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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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세상보기> 다 함께 잘살수 있는 방법
허남결
한국불교연구원 연구부장·철학박사

최근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의 빈부 격차는 두 배 이상 벌어졌고 아직도 전체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30억 명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의 어린이 6명 중 1명은 아동노동 시장에 편입되어 있고 이 중 상당수가 열악하기 짝이 없는 비참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다는 보고여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심지어 돈 많은 노인을 상대로 하는 노예결혼이나 아동매춘 산업의 성장 이면에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부모의 자식 매매가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 더욱 참담한 심정이 된다. 최첨단 물질문명 시대인 21세기에도 빈곤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제도도 향상되고 과학도 발달했지만 이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교적 지혜를 떠올려 본다.

불교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서도 자리이타행은 윤리학적 의미의 응용가능성이 가장 풍부한 실천원리라고 생각한다. 왜 ‘이타자리’가 아니고 ‘자리이타’일까?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 사실을 솔직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고려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부처님은 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고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다음 단계의 행위, 즉 ‘이타행’을 주문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은 딱딱하거나 어렵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자리’와 ‘이타’는 순차적 개념이 아니라 동시적, 자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떤 도덕적 갈등 상황에서 여법한 ‘자리행’은 동시에, 그리고 자동적으로 ‘이타행’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이익은 개인의 차원을 떠나 일체 중생을 다 함께 보듬는 보편적 차원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연기나 공, 무아설 등은 이런 자리이타적 의미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불자들의 교학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를 포함한 시방의 모든 유형, 무형의 생명체를 이익되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대승보살의 서원은 불교윤리의 시작이자 그 완성이 된다. 물론 이 이익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 그 사람의 인격적 면모, 즉 수행정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무튼 위에서 말한 불교적 의미의 ‘이익’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그 나름의 사상성과 함께 빈곤 문제의 해결에도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전체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윤리적 차원의 이익 개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현학적이고 화려한 교학지식의 나열보다 일반인들의 교양과 상식에 부합하는 단순 소박한 도덕적 판단 기준, 예컨대 자리이타행이나 요익중생 속의 ‘이익’ 개념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렵지만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실천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순진한 발상을 또 해 보게 된다.
2003-07-22 오후 2: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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