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군부 독재세력에 맞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이고 있는 평화지도자이자 인권을 대표하는 세계적 양심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녀는 가택연금 상태이던 1991년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것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녀를 대신해 두 아들이 오슬로에서 이 상을 수상할 때 노벨평화상위원회 위원장은 그녀를 “힘없는 자들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 최고의 사례”이며 “그녀는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어느 권력도 그녀를 침묵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아웅산 수지는 언젠가 그들을 군부독재로부터 해방시켜 줄 최선이자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지 여사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아버지 아웅산(Aung San) 장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얀마인들의 마음속에 아웅산은 건국의 영웅으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다. 독립전쟁을 거쳐 영국과의 힘든 독립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독립하기 불과 6개월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산은 암살 당했다. 그 때 유일한 혈육이던 아웅산 수지는 겨우 2살이었다.
45년 6월 19일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 출생한 아웅산 수지는 60년 어머니 킨 지(Khin Kyi) 여사가 미얀마의 인도 주재 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갔다. 4년 후 아웅산 수지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 세인트 휴즈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여 67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69년부터 71년까지 유엔사무국의 행정 및 예산문제 자문위원회 비서로 근무했고, 72년에는 부탄 외무부 연구원으로 일했다. 72년 옥스퍼드 시절 동창이었던 마이클 아이리스(Michael Aris)박사와 결혼했고,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이자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다.
그러나 고국 미얀마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88년 3월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 지자 조국 땅을 다시 밟은 그는 88년 8월 8일 시작된 소위 ‘8-8-88 민주화’의 한 복판에 서게 된다. 8월 8일 수만 명의 학생들과 노동자, 농민 그리고 승려들의 시위로 확대되었고, 양곤의 거리를 메운 이들은 62년부터 미얀마를 고립된 사회주의로 인해 병들게 만든 네 윈(Ne Win)과 그의 군부 독재세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부는 무제한 발포로 대응하면서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침내 1988년 8월 26일 양곤의 유명한 불교사원인 쉐다곤 파고다 앞에 모인 50만 명의 군중들 앞에서 수지 여사는 “나는 나의 아버지 아웅산의 딸로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에 무관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제2의 독립투쟁을 선언했다.
수지 여사의 평화적 시위는 군부의 가혹한 무력 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군부와 정면 대치하게 되었다. 88년 9월 친위 쿠데타로 다시 권력을 확보한 군부는 국가법질서 회복위원회(SLORC)라는 군사정권을 만들었다. 이에 아웅산 수지는 같은 달 전국민주연맹(NLD)을 창설하고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몇 차례의 암살 위기를 모면하고 수지 여사가 이끄는 전국민주연맹(NLD) 당원들은 1990년 총선에서 전체 485석 중 80%인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현재의 군사정권(SLORC)은 이러한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민주세력들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해 자택 구금에서 벗어났지만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지 않아 지난 5월 31일 다시 자택에 구금되었다. 수지 여사는 또다시 구금되었지만, 어떠한 위협도 그녀와 미얀마 불자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꺽을 수 없을 것이다. 진흙속에 피는 연꽃처럼, 온갖 더러움과 고난을 이기고 활짝 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