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의 행동언어)라는 모든 범주의 소통을 위한 수단이 필요하다. 선어록들은 이를 위해 비유ㆍ우화ㆍ은유ㆍ격언ㆍ민담 등은 물론 석녀, 나무새(木鳥)와 같은 독특한 상징체계를 십분 활용한다. 선사들이 뺨을 때리고, 엉덩이를 짓밟고, 코를 비틀고, 방할(棒喝)을 휘두르는 등의 기봉(機鋒)은 모두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답으로 칭송되는 유마의 침묵과 달마의 “모르겠다(不識)”는 선문답은 무식함을 나타내는 무언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고도한 진리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선사들의 법문 커뮤니케이션은 백성들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 시대의 일상 언어와 민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법문의 소통에서 받아들이는 중생의 눈높이에 철저히 맞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승들의 욕설과 막말이 공연한 허튼 수작이 아니라 이 같은 현대 커뮤니케이션이론에 일찍이 부합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선사들의 중생 눈높이 맞추기 법문은 불교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최종적 준거점이 될 만 하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설법은 훈고학적 설법보다는 법음의 상황화(機鋒)와 토착화가 중요하다 하겠다.
3. 선방의 개방화
불교 선방은 인류가 전자시대를 통과하는 이 때에 전통을 고수하는 문화적 외딴섬 안에다 끝내 자신을 가둘 순 없다. 종교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이해와 역할을 늘 쇄신해야 한다. 불교 역시 이러한 교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불교의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과거 위계적인 제도 사찰의 일방적이고 명령적인 사찰로부터 참여적이고 세속과 대화를 나누는 사원으로 나가야 한다.
중생제도란 사람들 사이의 쉽고도 참된 관계 설립이다. 따라서 선방은 자기 내심불(內心佛)과의 커뮤니케이션 장(場)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일치’와 공동선(共同善)에 관한 징표이며 도구가 돼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하나로 안거(安居)에 남녀 신도를 대거 수용하는 개방형 선방을 제시해 본다. 운수 납자의 나그네 길을 가는 선방의 선객들은 이제 아라한 적 성불에 더 이상 함몰되지 말고 중생제도라는 불교 본연의 포교 사명에 관심을 보다 더 가져야 한다. 선방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불법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다.
선방의 개방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선방은 수좌들의 내적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나와 함께 가야할 중생을 보듬는 세속과 대화하는 불학ㆍ선학을 해야 한다. 쌍방향 형 통행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의 상호작용은 이러한 선방 모델의 실천에 아주 적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선방은 이 세상 안에 위치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한 정의ㆍ자비 등을 통해 불성을 계시해야 한다. 이러한 선방 모델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으론 언어보다는 행동이 훨씬 절실하다. 수좌들도 중생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중생을 섬기러 왔던 부처와 조사를 모방해야 한다.
4. 언론의 불교 기사 보도
한국 언론의 경우 종교 기사는 극렬한 시비와 교리의 이해난, 종교의 신성성 등 때문에 성역시(?)해왔다. 1900년대 후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교의에 입각한 인권, 민권 투쟁 및 집권자들의 정치적 이용 등에 휘말린 사회참여가 대두하면서 종교 기사가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민주화가 성취된 1900년대 말부터는 환경ㆍ통일 등이 종교의 사회참여 주제가 됐다.
불교의 경우 1950년대 대처승 정화와 관련한 정화불사가 사회 사건화 되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민주화 투쟁이나 환경ㆍ통일 문제 등과 관련한 사회참여에도 나서고 있다.
과거의 문제들은 후일의 불교사 정리에 맡기고 당장의 불교 관련 보도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사례를 가지고 언론의 불교 보도 태도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례 1: 새만금 반대 3배 1보 운동>
새만금 간척 사업의 중단을 호소하는 3보 1배 운동은 비록 불교 종단이 조직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님이 앞장을 섰고 ‘3보 1배’라는 행위 자체가 불교적이었기 때문에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기사였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는 하나의 시사적인 사건으로만 접근할 뿐 불교사상과 교의가 얼마나 환경 친화적이고 3보 1배 운동의 배경이 되고 있는가를 심층 보도하진 않았다. 또 운동을 이끈 스님도 그 같은 운동에 대한 불교 교리적 주장을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바라기로는 운동이 회향되는 날에 ‘불교와 자연’을 주제로 하는 대대적인 심포지엄이라도 가졌으면 훨씬 효과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언론은 비록 그러한 이벤트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