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회 동국대 윤리학과 교수
막스 베버가 말했던가, ‘세상은 언제나 악마의 지배 아래 있으며, 누구든 일단 정치권력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미 이 악마적인 힘과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베버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책임윤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반대로 말한다. ‘인간은 어차피 사악하고, 위선자이며,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베버씨나 마키아벨리씨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지금 우리사회에 난무하는 주의(主義)와 주장을 다스릴 묘안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욕먹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려면 편들지 않는 것보다 현명한 처세는 없어 보인다.
편들지 않는 방편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편들 수 없을 정도로 사안이 정말로 애매한 경우다.
나이스(NEIS)를 둘러싼 싸움은 인권 보호와 교육행정의 효율성이라는 사회적 선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싸움이다. 이런 갈등은 인권과 효율성에 대해 동일한 도덕 원칙을 적용할 수 없는데서 발생한다. 인권은 효율성보다 높은 가치임에 틀림없으며, 그래서 폐기론자들은 당연히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싸운다. 하지만 나이스 폐기 반대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나이스가 심각한 정보유출이 아니며, 심각한 인권침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미묘한 사안에 대해 우리는 맨 정신으로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없다. 우리는 특정한 신념(이데올로기)을 동원해야 하며, 이런 신념에 기초한 선택은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선택(tragic choices)이 되고 만다.
두 번째로는 어느 쪽이 옳은지 알지만, 옳음보다는 좋음을 선택하는 도덕적 기회주의자로 남는 경우다. 예를 들면 새만금 간척사업의 계속이냐, 중단이냐의 싸움은 국토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사회적 선의 경중을 가리는 싸움이다. 이런 싸움은 대체로 사안의 우연적인 성격 때문에 발생한다. 왜 우연적인고 하니, ‘어떤 경우에도 환경을 파괴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는 대립적인 요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우연적인 외적·사회적인 요소가 개입되면서 정책결정자들의 용의주도한 눈치 보기에 차질이 생긴 경우이다.
세 번째는 두개의 상충하는 가치 말고 제3의 가치지향을 가진 경우다. 이런 태도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심각한 경우에 주로 취해진다. 우리 사회는 색깔이 불분명한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색깔에 따라 줄을 세우고, 편을 가르고, 서로 더 정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색깔 구분이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 타인, 타 집단이 적색인지 청색인지 녹색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나 같은 사회적 색맹은 종종 비겁하다고 비난받는다. 타인의 색깔을 구분할 수 없어서 어느 쪽에도 편승(便乘)할 수 없는 나로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편 색깔을 위해 결사 투쟁하는 사악한 정의보다는 ‘훨씬 자비로운 부정의(不正義)’로 용납될 것이다. 색맹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자신과 다른 코드로 연결되어 있고, 자신과 다른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편들어 주지 않는다고 ‘못해먹겠다’고 원망하지 말자. 민주적 제도와 인권적 가치를 존중하는 하는 한 그들은 그들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