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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1990년 기네스북에 오른 ‘세서미각(細書微刻)’의 달인 김대환씨. 13세란 어린 나이부터 스틱을 잡은 이래 70세를 넘긴 요즘도 드럼을 두드리며 국내는 물론, 해외공연만 500회를 넘긴 ‘타악의 명인’. 또 손꼽히는 오토바이 마니아 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20세기 인류사에 큰 역할을 했던 펜의 시대가 컴퓨터시대를 맞아 사라져감을 아쉬워한 한 예술가의 ‘볼펜 시대의 상징’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도 들어있다. 김대환씨는 지난해 월드컵때 붉은 옷을 입은 사람 수십만명이 모여 큰 힘을 이루는 것을 보고 ‘반야심경 음각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김대환씨의 삶에는 온통 반야심경이 녹아있다. 아침에 일어나 반야심경 한편을 쓰고 나서야 하루를 시작한다. 40여년동안 반야심경과 살다보니 쓰고 외는 것이 몸에 배었다. 프리재즈 타악연주가로서 북을 두드릴 때도 입으로 반야심경을 외우며 박자를 맞춘다. 비행기를 타고 갈때도,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릴 때도 식당내프킨에 반야심경을 쓴다. 손님이 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한 자도 틀림없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반야심경을 쓰곤 한다.
이번 ‘음각전’에서도 선을 보였지만 그는 좌서(左書)도 잘 쓴다. 좌서는 우서보다 2배 이상 힘과 시간이 들어간다. 그는 좌서를 쓰면서 구도행을 하는 수행자들을 연상한다. 초서(草書)의 대가인 중국의 진학종이 인정할 정도로 초서체에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김대환씨가 그렇다고 스승을 두고 정식으로 글씨를 배운 것은 아니다. 좋은 글씨를 찾고 그것에 대한 미학적인 연구를 게을리 않았다. 무엇보다 쓰고 또 쓰고 하루 몇시간씩 글씨삼매에 빠진 노력의 결과다.
김대환씨는 68년 동남아 여행중 상아에 깨알같은 글씨를 조각하는 중국노인을 보고 세각(細刻)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불심이 깊은 그는 “남에게 경을 읽어주는 법보시가 그 무엇보다도 큰 공덕이라고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남에게 보여주자, 알리고자 하는 생각에 여기저기 쓰다보니 글씨가 점점 작아지게 됐다.”고 말한다.
쌀 한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긴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엄두가 안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수십만 알의 쌀과 씨름해 겨우 성공했다. 0.2*의 조각칼을 만들었고 현미경을 보면서 일필휘지로 반야심경을 새겼다. 쌀에다 반야심경 283자를 새기는 자체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조각칼을 만드는 일이었다. 0.2*의 텅스텐 핀을 만드는 일은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유리와 같이 부서지기 쉬운 성질이라 정신이 조금만 딴데로 쏠려도 실패하기 일쑤다.그는 섬세하고 가는 텅스텐핀을 갈며, 제일 부드러운 것이 제일 강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쌀 한톨에 반야심경을 새기며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긴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미세각에 몰두하듯 소리에서도 원음(原音)을 듣게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지난하다. 열 손가락 사이에 여섯 개의 장구채 북채 드럼채 등 각기 다른 채를 끼우고 신명나게 소리를 만드는 그는, 전자음 컴퓨터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지나온 추억을 느끼게 하는 옛소리, 자연의 소리를 전달하려 애쓴다.
그의 연주회에는 이벤트가 따른다. ‘인간과 소리와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기도 하고 현대무용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즉석 좌서쓰기 등의 퍼포먼스가 벌어져 타악과 조화를 이룬다. 50년 넘게 북을 두드려왔지만 그는 요즘도 하루 일곱시간 이상 두드리는 연습을 게을리 않는다.
“이 세상의 박자는 홀수박과 짝수밖으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짝수박자는 배우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는 박자지만 홀수박자는 공부하지 않으면 ‘올 수 없는’ 박잡니다. 모든 박자는 일박에서 시작하니 가장 위대한 박자는 일박입니다.” 일박속에 모든 리듬이 다 들어있다. 일박은 무박(無拍)과도 통한다. 산골에 사는 할머니가 손으로 휘휘 저어도 척척 맞아들어가는 것이 일박이다.
그는 연주할 때 입속으로 반야심경을 왼다. 박자를 따로 세지 않아도 반야심경 독송만으로 기가 막히게도 운율과 박자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내 글씨의 세계하고 내 음악의 세계가 다른 줄 알지만 하나예요.” 어떻게 보면 그는 남들이 무시해 버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글씨를 마음으로 듣고 보게 하고자 노력해온 것이 한평생이 되었다. 그가 온갖 행위를 통해 이루려고 한 것은 일박에서 모든 박자가 비롯됐음 처럼 하나가 전체이면서 전체가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가 아닐까. 내가 곧 전체요, 내속에 전체가 있고 나는 전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를 그는 연주로, 반야심경 글씨로, 283자가 들어있는 한톨의 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원음을 듣게 하셨다.... ”
김대환씨를 만나면서 문득,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종 표면에 새겨져 있는 글이 떠올랐다.
누가 소리를 보았다고 하는가. 절대의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글씨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