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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작법 기능보유자 일응스님 입적
영산재 작법 보유자 일응스님(중요무형문화재 50호)이 5월 11일 새벽 4시에 입적했다.

영결식은 13일 오전 9시 경기도 용인 전통사에서, 다비장은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오전 12시에 봉행될 예정이다.

일응스님은 1987년 영산재보존회가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인간문화재로 선정됐다.

전통사 (031) 284-1181~3
인묵스님 019-213-4900


다음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스님의 법문.

인간문화재 지상법석
- “부처님 가르침 대로 행하면 우리도 자유인” -
- 온몽이 함께 아프듯 한곳 병들면 사회전체 고통-

<약력 >

·1920년 전주生
·34년 완주 대원사에서 박만암스님 은사로 득도
·38년 봉원사에서 이월하스님에게 범패의식 사사
·87년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기능 보유자 지정
·민속예술경연대회 우수상, 한국민속예술대전 대통령상등 수상

어느 제약회사가 광고에 ‘우리것은 좋은 것이여’란 말을 써서 유행을 시켰습니다. 우리 것 가운데 좋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유독 그 말이 유행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스스로 좋은 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며 살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평생을 우리 불교의 의식을 배우고 시연하고 가르치며 살아 왔는데 범패 역시 좋다는 것을 다 알지만 좋은만큼 잘 보전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것은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늦었으나마 이제부터라도 잘 전승하고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자들 모두의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교학을 많이 공부하고 선수행을 많이 하신 스님들은 법문을 잘 하시지만 범패만으로 살아 온 나는 법문을 잘 못합니다. 아니 나는 법문이나 설법이란 말도 감히 쓰지 않습니다. 그저 신도들에게 얘기 하는 것을 인과설이라고 할 뿐입니다. 인과설이라고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부처님이 밝혀 놓으신 인과의 도리를 잘 알아서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는 얘기란 의미입니다.

오늘 인과설을 한마디 하고 싶은데 그 주제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유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도 합니다. 자유와 문명, 둘 다 참 좋은 말이고 둘 다 좋은 시대의 살아가는 모양새입니다. 문명은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발전해 가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문명시대에 누리는 자유는 이제껏 인간의 역사가 소중히 생각해 온 것에 대한 가치를 뛰어 넘기도 하고 변질시키기도 하는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발전은 좋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란 말에 전적인 찬성을 하며 은근한 향수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발전이란 좋은 것이지만 그만큼의 부정적인 모습도 동반한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우리가 문명시대를 잘못 이끌어 가고 있다는 증거도 될 것입니다. 지금 무엇이 좋은 발전이고 무엇이 발전의 나쁜 영향인지를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조건 발전하려고만 하는 욕심에서 우리 스스로 잃어 가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한다고 합니다. 약 30여년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무엇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걸 ‘순종과 거역’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순종의 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에게 순종하고 사회의 규율에 순종하고 스스로의 운명과 자연에 순종하는 심덕이 두터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역의 심성이 강합니다. 문명의 발달은 전통 가치에 대한 거역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가 봅니다. 어른들의 가르침에 거역하려 하고 사회의 규율을 거역하려 하는 심성이 갖은 범죄와 패륜을 낳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자나깨나 자유를 노래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낙담해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자유가 아닌 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정신을 좀 차리는 계기가 생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자유라는 것을 냉정히 생각하고 그걸 바르게 누리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심덕이 누리는 자유는 매우 겸손하고 맛이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거역의 심성이 추구하는 자유는 맹목적인 분위기로 흐르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맛도 없습니다. “내가 내 자유대로 하는데 누가 말리느냐”는 식의 정신자세가 팽배한 이상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그런 무희망의 방종시대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유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음식이요 보약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생명도 음식이 끊어지고 약을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음식과 보약도 잘못 쓰면 독이 되는 것이거든요. 음식을 음식으로 알맞게 쓰고 보약을 보약으로 알맞게 쓰면 그 생명은 건강을 유지하고 병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허용하는 만큼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의 자유를 억지로 만들어 쓰려고 하면 사회는 반드시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회도 한 인간(생명체)의 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의 생명체라면 내가 속한 사회는 더큰 나, 대아(大我)란 말입니다. 내 손에 상처가 생기면 온 몸이 고통을 나눠 갖듯이 우리 사회의 어느곳에 병이 생기면 온 사회가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소아(小我)이면 내가 우선 누리고 이루어야 할 자유는 소자유가 될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럽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것 그것은 불자들이 갈구하는 해탈성불입니다. 부처님을 대자유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진 분이기 때문에 대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불자들도 온갖 번뇌와 생로병사의 고통과 육도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공부하고 수행하고 선업도 짓는 것 아닙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우리도 대자유인이 됩니다.

대자유를 누리기 위한 불자들의 노력은 우선 소자유를 완성하는데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자유니 대자유니 하는 구별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편의상 구별해 봅시다. 소자유는 이 인간의 몸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올바르게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의 법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벗어 던지지 말고 인륜을 지키는 것 그리고 남의 잘못을 일깨워 주고 남의 고통을 나눠 가지는 것 이런 일들이 소아의 소자유를 완성시키는 덕목들인 겁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잘 지키며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대자유를 얻게되고 내가 속한 사회 즉 대아도 대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곳을 극락이라고 하는 것이니 극락은 우리가 자유라는 보약을 제대로 쓰는 곳에 있는 것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본래진면목입니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습성을 간편한 것과 자동적인 것에 의존하게 이끌어 왔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인간과 본래진면목을 멀어지게 만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이란 생명체가 있는한 그 본래면목은 그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그 본래 모습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문명이 자유를 굴절시키고 그 굴절된 자유를 굴절된지 모르고 추종하다 보니 세상은 험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중의 으뜸가는 존재입니다. 이 인간의 몸을 받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어느 순간의 선덕으로 갑자기 받은 형상이 아닙니다. 무수한 과거생의 선덕들이 쌓이고 쌓여서 받은 귀한 몸인 것입니다. 이 몸을 잘 운전해서 다음생은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몸을 잘 운전하는 것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유라는 음식과 보약을 잘 쓰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소아의 소자유를 잘 쓰면 대아의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 세상이 왜 이렇게 흉흉해 지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나는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좀 틀린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의 생각을 말해 보겠습니다.

옛날의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갓난아이를 보호했습니다. 물론 의학이 요즘만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고 사람들을 함부로 출입 시키지 않고 극진히 보살폈던 것입니다. 삼칠일을 그렇게 악연을 삼가하며 극진히 돌본 뒤에라야 이웃사람이 그 아이를 볼 수 있게 했는데 요즘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으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이 아닌 병원 사람의 손에 넘겨지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영양을 공급 받으며 보호를 받습니다. 어떤 병원은 산모조차 아기를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갓 태어난 아기가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어미의 따뜻한 품에서 어미의 젖을 먹으며 극진히 보호 받는 것과 직업인들의 계산에 따라 보호받는 것, 둘 중 어느것에서 아기는 사랑을 느끼겠습니까.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어쩌면 갓태어난 아기가 수십년을 산 어른보다 더 정확히 알 것입니다. 문제는 아기가 느끼는 사랑뿐이 아닙니다. 우주의 좋은 기운을 어미의 품 속에서 삼칠일을 받아들인 아이와 병원에서 보호 받으며 세상을 만나는 아이와 그 심성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비유가 이상했는지 모르지만 현대인들은 출생하는 순간부터 우주의 좋은 기운과 어미의 따뜻한 사랑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할 고귀한 자유를 억제당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귀한 인연이 출생부터 잘못 길들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응의 심덕 보다 거역의 심성을 미리부터 배우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라나는 환경도 매우 전투적이고 적자생존의 각박한 현장의 긴장으로 가득 찬 곳이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그렇다고 아이를 옛날 방식대로 키워야 한다는 억지는 합당치 않겠지요. 우리 사회가 순응의 덕성과 참된 자유로 가득 하면 될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주어진 자유를 잘 못 사용하면 죄를 낳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니까 배꼽티라든가 초미니스커트와 같은 것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아가씨들이 늘어나지만 누구하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잘못된 것이어서 청소년들의 범죄심리를 자극하고 실제로 어린 나이에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스게 소리같지만 옛날엔 여자들이 옷을 겹겹이 입어 몸을 가렸는데 요즘은 여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벗으려고 애를 쓰고 남자들은 넥타이로 목을 바싹 졸라매고 다닙니다. 이것이 문명시대의 자유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죄가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의복뿐이 아닙니다. 먹는 것이나 거주하는 공간도 모두 문명의 영향으로 인성을 해치는 쪽으로 변화되어갑니다. 그 변화를 자유로이 받아들이고 누리지만 그 뒤에서 싹트는 죄업의 씨앗을 걱정하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자람 없는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후손에게 무엇을 전해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백년후의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들처럼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말로만 한다면 슬픈 일이겠지요. 그들에게는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아련한 향수조차 없을테니까요. 그 후손들은 우리 것이 좋다는 인식마저 안해도 되게끔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전통과 자유 속에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더이상 굴절된 자유를 먹으며 죄악의 그림자를 키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과법에는 속임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자유가 방종으로 물들면 후세에는 방종이 자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생명을 죽이고 거짓 생명을 참생명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원히 극락세계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음식이 우리들 개인과 우리 사회라는 대아를 고루 살찌우게 하여 마침내 대자유의 나라 극락정토를 이루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충만하고 열락으로 장엄한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도 한번의 발심이 없으면 캄캄한 밤중의 절벽끝에 선 꼴이니 참된 자유를 누리는 서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부디엔스 buddmaster@buddhapia.com
2003-05-12 오전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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