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쯤은 어떤가
속세 떠나는 산
진리 머무는 절에 가서
입정
참선함이 또한 어떠할꼬?
할! ('속세 떠나는 산, 진리 머무는 절' 중)
"시인은 소각(小覺)을 해야하는데 대각(大覺)을 하니 시상이 막혔다."
지난해 화엄 연기의 세계관을 담은 시집 <화개(花開)>를 낼 때까지 시작(詩作)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던 김지하(62) 시인. 저항시인이자 생명운동가, 동양사상가로서 누구보다 선(禪)에 대한 문학적, 수행적 관심을 쏟아내 온 그가 산사 순례시를 통해 또다시 선기(禪機)를 드러냈다.
김지하 시인의 불교 인연을 더욱 곱씹게 하는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창작과 비평사刊). 김 씨는 이 책에서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의 딸이자 불교미술사학자인 부인 김영주 원주토지문화관장과 함께 2년 여에 걸쳐 전국의 절을 순례하며 지은 시 32편을 달마, 매화, 난초를 주제로 한 수묵화를 붙여 서화첩을 내놓았다.
이미 몇 차례 수묵화 전시회를 통해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였던 그는 선암사, 금산사, 화엄사, 내소사, 운주사, 쌍계사, 백양사, 구룡사 등을 방문해 절에 깃든 선사들의 자취를 좇고 그들과 정신적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
"아아 아득한 天台까지 이어온/ 구슬픈 仙史를 알겠구나/ 텅 비인/ 山神의 자리..."('산신각 중) 처럼 불(佛)과 선(仙)을 결합한 시편이 주류를 이룬다."
김 시인은 '추(醜)의 미학'이라는 제목의 서문에 "(전작 시집)<화개(花開)>의 애잔함과 슬픔을 넘어 선적 생명의 숭고함에로, 모순어법의 섬광과 촌철살인을 넘어 불적인 영성의 심오함에로 나아가고자 했다"고 작품 경향을 밝혔다. 산사 순례에 나선 이유는 그러나 단순했다.
"신경이 어수선하고 몸이 피로해서 1달에 1번 정도 아내와 산사를 찾았어요. 뛰어난 절경과 신선한 공기도 좋았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류를 고스란히 전해준 스님들이 여간 감사하지 않았지요."
그는 명찰을 찾을 때마다 하룻밤을 묵고 온다. 큰 절은 기운이 맑고 깨끗하며, 절밥과 새벽공기는 찌든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씻어주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예술사> 등의 저서를 낸 부인 김영주씨는 불교 서적이 가득한 서재에서 뿐만 아니라 절에서도 뷸교 강의를 쉬지 않는다. 동학 등 한국 전통사상의 대가인 시인도 "불교는 주로 집사람한테서 배웠다"고 말할 정도다.
김지하 시인과 불교와의 인연은 어릴 적부터 시작됐다. 큰 화주 보살이었던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사를 오르내렸던 그는, 감옥에 있을 때는 100일간 참선하면서 선사들의 게송을 250수나 외웠을 정도로 불연을 쌓았다.
유신 말기, 그가 독방에 수감됐을 때다. 천장이 내려 앉고 사방 벽이 좁혀 들어오는 '면벽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창틈으로 날아 들어온 하얀 민들레씨, 그리고 벽돌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린 개가죽 나무를 보는 순간 까닭 모를 울음이 터진다. 하루 종일 울고 난 어느 순간 허공이 진동하면서 '생명'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더란다. 동시에 저 무소부재한 생명의 이치만 터득하면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자유자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선을 시작한다. 그리고 눕지 않고 좌선한 지 100일 만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참선이 끝난 뒤로 마음은 고요히 가라앉은 평지가 됐다. 벽면증도 해소됐다.
그러나 그는 불교 신도로 한정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유불선이 포함된 민족 고유의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사랑하는 동양사상가로서 불교를 만끽하는데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절만이 칠성각과 산신각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仙道)사상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원융무애한 진리를 설하죠. 서구에서 불교를 찾는 것은 이원론적인 대립 사상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상호접합성을 지닌 불교와 선도의 사상이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 것입니다."
그는 민주화 투쟁시절 알게 된 지선 스님과 생명운동을 함께 펼친 수경, 도법 스님을 존경한다면서 불교의 생명, 평화사상은 인류문명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 두시간씩 난(蘭)을 치고, 독서와 글쓰기, 산책 등으로 하루를 보내는 그는 요즘 회고록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 제목의 가제는 '모로누운 돌부처'다. "꿈속에서 보리밭에 누워있는 돌부처를 몇번이나 보고 제목으로 정했다"는 그는 "나에게 '구도'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그 길을 따라 평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절, 그 언저리
김지하 지음
창작과비평사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