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명랑법사가 사천왕사에서 유가명승 12명과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 밀교의 비법)을 행해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고, 고려 말까지 그 단석(壇席)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단석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동국대 장충식 교수(미술사학과)는 최근 발간된 <불교학보> 39집에 기고한 논문 ‘신라 사천왕사지 단석의 고찰’에서 금당지 후방(북쪽)의 좌ㆍ우경루(左ㆍ右經樓) 초석이 바로 문두루비법을 행하던 단석이라고 지목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천왕사지의 금당지 후방에는 동서로 대칭하여 각각 12개의 초석이 토단 둘레에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1930년 일본학자 후지시마 이후 경루의 초석이라는 게 일반적 의견이었다.
그러나 장 교수는 이 초석의 특수한 형태에 주목했다. 초석은 상면 중앙에 각기 직경 약 20cm의 원공(圓孔)이 있고, 원공 주변에 약 50cm 내외 크기의 이중 돌기선이 정방형으로 몰딩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네 모서리 부분에서 사각을 이루면서 초석의 네 귀퉁이로 연결됨으로써 일종의 우동(隅棟) 형태를 취하고 있다<사진>. 장 교수는 “경루라면 초석 자체가 기둥에 숨겨지기 때문에 원공이나 몰딩과 같은 조형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며 “반드시 외부에의 노출을 전제로 하고 제작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남아 있는 초석이 12개가 아니고 24개일까? 장 교수는 “금당 전방의 쌍탑과 뒤쪽 좌우에 각기 12개씩 존재한 초석은 당시 유행했던 통일신라의 좌우대칭식 가람배치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며 “좌우대칭이므로 24개이 되지만 좌우를 각기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예는 나중에 조성된 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의 십이지신상 24구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