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눈먼 마음들이 ‘있는 것’, ‘없는 것’, ‘있을 것’, ‘없을 것’ 끊임없이 엉켜 흐트러 놓아도 이제 하나를 알고 그 세상 무엇들이 다 내 안에 있으니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이 눈 익은 퍼즐 조각 단번에 자리 찾듯 한 줄기 섬광과도 같은 직관으로 단칼에 무명(無明)을 날린다.”

송광사 행자 출신의 자칭 ‘농부’ 윤구병(60)씨가 낸 철학책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있음과 없음>(보리刊)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화두 풀이다.

1996년, 53세의 늦은 나이에 대학 교수 자리를 버리고 전북변산에서 농사 짓고 공동체 학교를 꾸리는 철학자 윤구병씨. 그가 대학을 버리고 생태공동체 건설에 나서게 한 실천적 문제의식을 존재론적으로 조망한 이 책은 책 표지 안에 쓴 말 그래도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하여 쓴 윤구병식 존재론 이야기’다.

그의 전공이었던 서양 고대 철학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존재론을 풀아가는 이 책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묻고 답하듯이 풀어가는 글을 통해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보여준다. '존재와 운동' '하나와 여럿' 등의 주제를 자신의 경험과 구수한 어법으로 구사하는 책 내용은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유전무죄니 무전유죄니 하는 세간의 이야기들이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다양하게 인용되는 등 지루하지 않게 철학을 접할 수 있다.

제논이나 파르메니데스 뿐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독교형이상학의 여러 존재론의 사고 틀은 윤구병식으로 해설되며, 그 과정에서 불교적 사유를 엿보게 하는 시간과 공간, 유한과 무한, 실체와 현상, 좋음과 나쁨의 문제가 언급된다.

윤구병씨의 철학은 결국 ‘있음/없음’의 존재론을 징검다리로 해서 ‘있어야 할 것, 없어야 할 것’이라는 실천론으로 넘어간다. 거기서 그가 꿈꾸는 목표는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증오처럼 없어야 할 것들이 없는’ 사회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긴밀하게 연관 맺고 있는 문화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반쪽이다. '있음' '없음'에 이어 '함' '됨'의 문제를 다루었어야 하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될것인가'를 전혀 다루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아마도 기약없는 다음 책에서 그 내용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독자들이 변산공동체를 한번 방문하는 게 나올 것 같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이었던 그의 아버지, 한국전쟁 과정에서 잃어버린 6명의 형, 소주 한병과 오징어 뒷다리를 뒷주머니에 꽂고 다닌 고등학교, 서른네살에 출가해 송광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 임신한 아내가 아이 손잡고 찾아오자 하산한 일, 그리고 교수직 사퇴….

철학교수들을 대표해 글을 실은 이정호 방송대 교수는 "존재론을 강단의 것이 아닌 현실의 것으로 되돌리는 그의 통찰에 주목해 후학들이 책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적었다.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있음과 없음
윤구병 지음
도서출판 보리
1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