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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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속철 반대 불교도대회를 보며
봄이 왔음을 아는 데 온산의 푸르름이 필요치는 않다. 인간사도 그렇다. 단 한사람만 깨어있어도 인류는 잠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한 사람만 깨쳐도 만생명이 깨친다’고 한다.

지율 스님. 앞으로 한국 사회는 이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지난 2월 5일 경부고속철 천성산·금정산 통과를 반대하여 단식에 돌입, 대통령으로부터 노선 ‘재검토’를 받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각성된 한 사람의 힘이 능히 만생명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키는 진짜힘

지율 스님이 뿌린 ‘단식’이라는 씨앗은 14일 부산시청 앞에서 열린 ‘자연환경 보전과 수행환경 수호를 위한 불교도 정진대회’라는 나무로 자랐다. 하지만 이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불교도 정진대회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환경 보전과 수행환경 수호’라는 장황한 수식어를 단 ‘불교도 정진대회’에 대해 주최측에서는 불교적인 집회의 전형을 제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불교적’인가. 법고를 울리고 목탁을 치면서 ‘생명의 존엄’만을 외치면 불교적인가. 결코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적인가. ‘법구경’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무서워한다. 내 생명에 이 일을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적 실천의 준거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참회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이었나를 먼저 살펴야 한다. 물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온당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각성을 전제하지 않은 문제 제기는 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다. ‘나’를 뺀 ‘우리’의 참회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번의 불교도 정진대회를 현대 문명과 그것에 근거를 둔 우리네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로 이어가자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온갖 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반개발만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이다. 근본적으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전 지구적 파멸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소박한 밥상’과 ‘작은 집’에 살기를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지 않고는 앞으로도 이런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참회·상생의 출발점 돼야

궁극적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정부나 기업이 아니다. 자본과 정치는 인간의 탐욕을 자양으로 하기 때문이다. 좀더 냉정히 말하면, 반개발을 외치는 우리 모두가 개발의 ‘숙주’이기도 한 것이다.

결코 이번 불교도 정진대회를 금정산·천성산 통과 저지라는 개별 사안으로 함몰시켜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의 반생명적 삶에 대한 참회의 마당으로 삼아야 한다.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과의 상생이 가능한 삶을 일구어나가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불교의 시대적 소명이다.
지율 스님은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38일간이나 굶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밥을 줄여야 할 차례다.
2003-03-19 오전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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