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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권혁도(48).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 세밀화가다. 어린이 책 분야 스테디셀러인 창작 그림책 <누구야 누구>를 비롯해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식물도감>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동물도감>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 그림책> 등을 작업했다. 그는 지난해 6년여의 작업 끝에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곤충도감>을 펴냈다. 95년부터 우리 주변의 곤충들을 채집해 직접 그 생태를 관찰하고,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글로 일일이 기록하며 137종 231가지 곤충 그림을 완성했다. 이 가운데, 그가 키우고 관찰하지 못한 건 벼룩과 이 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곤충 박사가 되어있었다. 시골집에서 구데기가 살고 있는 호박을 가져와서 구데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가 하면, 뽕잎까지 따와 누에를 기르고, 사마귀 알집을 채집해 온 집을 사마귀 천지로 만들기도 하고, 새벽 3시가 넘도록 왕잠자리의 허물벗기를 관찰하며 변화의 과정들을 사진 찍고, 기록하면서 말이다.
그의 작업실은 서울 하계동의 한 아파트. 현재 그의 작업실 베란다 화분 나뭇가지에는 나방으로 추정되는 주머니가 대롱대롱 달려 있고, 문틈에도 허물벗기 직전의 번데기가 붙어있다.
그는 매일 오전 9시 작업실에 나와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작업실 중앙에는 영산회상도 액자를 걸고 향과 초까지 마련된 불단이 있다. 그 앞에 앉아 예불문, 천수경,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관음정근을 한 뒤, 40여분간 참선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 모두를 여법하게 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3년 전 뒤늦게 불교 공부를 시작해, 재작년 제7회 조계종 포교사 시험에 합격하고, 포교사단 장의봉사1팀으로 활동하는 불자이다. 한달에 2~3회 봉사활동을 하고, 지난달부터는 보다 체계적인 불교 공부를 위해 봉선사 불교전문강원 통신반에서 공부중이다.
그의 법명은 시우(時雨), 법장사 퇴휴 스님이 지어주었다. 때에 맞춰 비를 내려준다는 뜻인데,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소할 법의 비를 내려주라는 스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 법명처럼 살아야겠다고 늘 서원을 세운다.
◈ 0호, 00호 붓으로 그리는 세밀화 그리기
그가 쓰는 붓은 여느 화가들과는 좀 다르다. 0호 또는 00호 붓을 사용한다. 마치 바늘처럼 예리한 붓이다. 수채화로 표현되는 그의 세밀화는 생명체의 본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담아낸다. 우리가 더럽고 징그럽게 여기는 구데기, 파리, 모기까지도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답게 느껴진다. 존귀한 생명의 본 모습을 담은 따뜻한 그의 그림을 아이들과 엄마들이 무척이나 좋아한다.
“관찰이 끝나면 연필로 스케치를 합니다. 가능하면 채집해 온 곤충이 죽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맨 먼저 곤충의 눈부터 그리고 색을 칠합니다. 일단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이 다하면 눈과 몸의 색깔부터 달라지기 때문에 관찰하고, 사진 찍고, 기록하고, 다시 스케치하는 과정은 참 힘이 듭니다.”
그는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영업사원처럼 늘 시간이 부족하다. 바늘끝 같이 가는 붓으로 한 시간을 그려도 그림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부지런히 작업을 해도 한 달 동안 작은 그림 두 세장 그리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르면 반드시 그림을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급해지거나 답답한 생각이 들면 오히려 붓을 내려놓고 잠시 다른 일을 한다. 서둘렀다가 잘못되어 되돌아오는 것보다 느리지만 바르게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여유롭기 때문이다.
◈ 어린이와 어린이 그림책에 대한 그의 생각
그는 어떻게 세밀화를 그리게 되었을까?
추계예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딱 6개월만 다니자고 들어간 금성출판사에서 6년 6개월간 근무하며 어린이 그림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키웠다.
“그때만 해도 어린이 그림책, 특히 우리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보리출판사와 인연이 되어 세밀화 작업을 하게 되었지요.”
곤충도감 준비를 위해 곤충 그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 쯤 됐을 때, 그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곤충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상점 앞에서 물건을 먼저 사겠다는 달려드는 사람들, 점심시간이면 우루루 몰려 나오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아장 아장 걸어다니는 아기까지 모두가 곤충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느꼈죠. 살아가는 모습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엔 다 똑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요. 그 느낌들을 제 그림에 고스란히 담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세밀화 그리기를 ‘나의 길’이라고 표현한다.
“화가로서 훌륭한 회화 작품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은, 정성스럽게 그린 내 그림이 여러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을 통해 아이들이 간접적이나마 자연을 경험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따뜻한 감성을 키워 갈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는 <곤충과 작은 동물>(가제)이라는 어린이 책 작업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이 책은 곤충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책으로, 어떻게 애벌레가 성충이 되고, 조심해야 할 곤충은 무엇인지, 참나무 숲 속의 낮과 밤에는 어떤 곤충들이 활동하는지 등등을 담아낼 계획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 꿈꾸는 것은 책을 통해 이뤄지는 만남이 아니다.
“어린이들이 직접 곤충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곤충을 장난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애정을 느끼고, 꿈틀대는 곤충과 눈도 마주하면서 생명의 소중함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번 작업이 끝나면 어린이들이 생활 속에서 곤충을 길러볼 수 있는 안내서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