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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서울에서 태어나 9살때 안양 삼막사로 출가한 법홍스님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악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35년 영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건봉사에서 대교과를 마친 스님은 월정사, 법주사, 쌍련선원 등에서 수행하다 2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천태종 천초불교전문학원 불교학과, 입정(立正)대학 종교학과, 비예산(比睿山)불교학원에서 수학했다.
1963년 원효스님의 사상을 현대에 되살리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며 원효종을 창종한 스님은 원효종 총무원장과 8·9·10대 종정을 지냈으며, 1971년 묵담스님으로부터 제10대 동국율사 전법을 받아 한국불교의 율맥을 이어왔다.
영결식은 3월 14일 오전 10시 부산 금수사에서 종단장으로 치러지며, 다비식은 오후 2시 양산 통도사 연화대에서 거행된다.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一念成四大(일념성사대) 한 생각 사대를 형성하니
因緣聚霧散(인연취무산)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짐이 안개와 같구나
心識本來空(심식본래공) 마음과 생각 본래대로 공해지니
日月澄淸明(일월징청명) 해와 달이 밤낮없이 밝구나.
다음은 현대불교 가까이서 뵌 큰스님을 통해 법홍스님을 조명한 글이다.
법홍스님(원효종 종정)
<관무량수경>에 보면 ‘계향훈수(戒香勳修)’라는 말이 있다. 훈습을 통해 계향이 몸에 스며들어 그 사람의 덕향이 온 사방에 풍긴다는 뜻이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에 와닿는 숱한 자극들을 제거하고서도 마음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그 사람의 덕향이고 보면 결코 속일 수 없는 경계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부산 초량동 산복 도로. 버스를 내려서 가파른 경사의 108계단을 올라야 절문 앞에 닿을 수 있는 금수사는 평생 청정비구로 계율을 근본 삼아 살아온 법홍스님의 계향을 느낄수 있는 도량이다. 금수사 곳곳에 스며 있는 스님의 자취처럼 법랍 78년을 맞은 율사 법홍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청정한 계향이 역시 자연스럽게 풍기는 것을 알수 있었다.
밤이면 부산시내의 야경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금수사를 오르는 계단에서 스님과 마주쳤다.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한다. 아직도 종단 내외의 대소사를 챙기며 전법 활동을 널리 펴시는 스님은 젊은 사람도 숨 차 하는 계단을 지팡이 하나로 가뿐히 오른다. 87세라는 세수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스님의 건강은 곧바로 스님의 수행력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53살의 나이로 100일동안 280군데의 절과 불상을 참배하는 ‘회봉수행’을 성만한 일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회봉수행’은 일본 천태종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하루에 800고지의 산을 70여리나 걸어야 하는 수행이다. 일본 천태종에서는 이 수행을 마쳐야 주지 자격을 준다.
“53살이나 된 사람이 하겠다고 하니까 주변의 만류가 심했어. 일년에 2~3명씩, 20~30대의 젊은 사람만 하는 공부법이니 아예 허락을 하지 않았지. 주지스님과 불교학원 원장이 보증을 서 주어서 겨우 동참했어요. 불교가 일본에 들어온 이후 100일 회봉을 해낸 외국 스님은 내가 최초였다고 해.” 스님은 그렇게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을 하루 12시간씩 걷는 힘든 수행을 마쳤고 산에서 3년동안 두문불출하는 수행과 8년 안거를 계속했다. 이후 61살의 나이로 일본의 보림사 주지를 지낸 스님은 지금도 일본을 오가며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스님은 일본어에 능통하다.
“한 달이면 반 이상을 일본에 가 있을 때도 있는데 일본 절에서는 할 일이 많아. 내가 일일이 빗자루 들고 청소도 해야 하고 300평이 넘은 정원의 정원수 가지치기도 하고, 어느 땐 가지치기만 해도 며칠씩 하거든. 그에 비하면 금수사에서의 일상은 너무 할 일이 없는 편이지. 보편적으로 볼 때 한국 스님들의 생활은 너무 편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수행생활이 편한것은 좋지 않아요.”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 수행자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생사를 깨치기 위해 출가한 스님들이 도리어 안락함을 탐하거나 고급 취미를 갖는다면 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됐으니,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 수행자답게 검소하고 간명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지금도 원효종 행사장 여기저기를 다니며 직접 행사를 지시하곤 한다. 수십년 동안 몸에 스민 근면함과 철저함은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에겐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스님의 부지런함과 철저함은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의 행동기준이 늘 부처님을 향하고 있으니 스스로를 경책할 때도, 또 타인을 꾸짖을 때도 스님의 기준은 하나, 오로지 부처님 법에 부합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스스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부처님이 가르친 그대로를 행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금도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에 입각해서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서원을 새벽예불 때마다 되새기고 있다.
“스님도 스스로 부족하다거나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한 분이기에 짐짓 당돌한 질문을 드렸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잠시의 틈도 없이 돌아온다.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야. 허허허.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모두 여의어야 한다고 했거든. 그런데 아직도 나라는 상, 즉 아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지. 네가지 상을 모두 떠나야 되는데 그 중에서 하나도 떠난 게 없으니 그게 단점이야. 단점 중에서도 아주 큰 단점이지. 그러면 네가지 상을 어떻게 하면 떠날 거냐, 그게 문제야. 부처님 말씀 가운데 그 사상(四相)도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했으니 그 상 가운데 있어도 상에 취하지 말아야 하겠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취하지 말고 도가 높더라도 마음을 낮추고 명예가 높더라도 이름을 낮추고 하심하면서 모든 불자를 이끌어 주어야 하겠지. 그런데 그렇게 잘 안되고 있어요.”
오직 자신의 행동이 부처님 법에 맞는지를 살펴가는 스님의 행동 준거를 또다시 확인할 수 있는 말씀이다. 또한 얼마전 문제가 되었던 원효종 내분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이 당신에게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남의 잘못을 보기 이전에 오직 자신의 행동이 법에 맞는지를 살피라’ 했던 부처님 말씀을 떠오르게 했다.
“종단을 이끌려면 권속들을 잘 두어야 하는데 권속을 잘 두고 못 두고는 자기의 법력 가운데 있고, 자기의 수행 가운데 있는 것이니 분란이 일어난 것은 내 수행과 정진의 부족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면 그런 분란들도 귀의처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무더웠던 올 여름 보문사에서 회향한 오후 불식 100일 묵언기도와 고대도에서의 일주일 관음기도 모두가 스스로의 정진 부족을 경책하는 것이었다. 젊은 제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기도 100일째가 되는 날, 오랫동안 단청 불사를 못해 애를 태우던 아산 보문사의 대웅전, 관음전, 누각 등의 단청 불사가 회향되었다고 한다. 보문사를 지으신 석주스님(칠보사 조실)은 종단의 원로스님 중에서도 가깝게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사이라 단청불사 회향의 기쁨이 더욱 각별했다.
“나이도 많고 승려생활도 어려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했는데 모든 게 순간처럼 지나가 버렸어. 부처님께서도 인생은 풀끝의 이슬 같다고 했잖아. 그러니 더욱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 한 순간이고 한 찰나이기 때문이지. 부처님께서는 네가지 얻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했어요. 인간의 몸 받기 어렵고 사내 대장부 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고 출가하기 어렵다고 했어. 여기서 출가가 어렵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 깎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참된 출가수행자란 승복만 입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예요. 부처님이 설하신 근본 뜻을 터득해 중생을 구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스님인 게지.
모두들 한 해가 가고 있으니 여태껏 허송세월만 해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발심해야 합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불제자들이 다가오는 새 해에는 새로운 발심으로 원력을 세워 본래면목을 찾는 노력을 더욱 열심히 했으면 해요. 이왕 이 세상에 나왔으니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면서 뜻한 바를 이루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가 있어야지. 후대의 권속들에게도 모범이 되려면 내가 먼저 청정하고 철저해야 해.”
법홍스님은 87세 삶이 순간처럼 지나갔다고 했지만 그 편린이나마 자세히 듣고 싶었다. 스님의 젊은 시절은 스님이 들려주는 얘기 속에서 아주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처음 안양의 삼막사로 출가한 이후 호압사로 옮겨 노스님 한분을 모시고 지내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독살이 절이니까 학교 갔다 오면 절구로 보리방아도 찧고 우물에 가서 물도 길어오고 그랬어. 9살에 시작된 절생활이 경허스님께서 득도하셨던 청계사를 거쳐 화장사로, 지장사로 이어져 나중에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4년 정도 공부하게 됐지.”
대륜스님의 소개로 금강산 유점사 강원으로 가게 된 스님은 그곳에서 사미가 되었다. 5년 만에 사미가 된 것이다. 그때 유점사 선방에는 만공, 효봉, 청담, 고암 스님 등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차를 나르고 따르는 다각 소임을 맡았다. 유점사에는 15살부터 18살까지 있었는데 효봉스님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 효봉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스님은 훗날 해인사에서 5년 정도 스님을 모시고 살았고 송광사에 계실 때에는 방학때마다 찾아뵙곤 했다.
“효봉스님은 언제나 ‘어묵동정 가운데 이뭐꼬만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3년 동안 토굴 정진을 하고 나오셔서 만공스님께 인가를 받고 입승을 했는데 그 분 정진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늦깎이라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며 한번 앉으면 포행도 잘 하지 않았어요. 근래 수좌로서 그분만큼 철저한 수행납자도 드물어. 그분을 보며 나도 과거의 조사스님처럼 뜻을 이루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발심을 하곤 했지.”
스님은 효봉스님을 모시고 계속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금수사 주지, 원효종 총무원장을 거쳐 현재 종정에 와 있는 것이 전생의 업장이 두터워서 그런 것이라며 효봉 스님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토로했다.
“불문에 들어온 것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야. 백천만겁난조우라는 말이 있잖아. 만나기 어렵다는 불법을 만나 불문에 들어왔고 출가 본연에 충실해 살자고 맹세를 했으니 그것 이상 행복한 게 어딨겠어?” 스님의 행복론이 이어진다.
“우리절 신도 중에는 노보살이 많아요. 만공스님이나 경봉스님께 화두를 받아 오랫동안 수행해온 이들이어서 내가 오히려 배워야 될 정도로 수행이 깊지. 내가 공부를 물으면 ‘묻는 스님은 어떤 화두를 갖고 나한테 묻습니까?’ 하거든. ‘그 답변을 듣고자 해서 내가 묻습니다’하면 ‘스님이나 내가 둘이 아닙니다. 몸은 다르고 생각하는 이념은 다를지언정 부처님의 혜명은 스님이 가진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이 같지 않습니까? 본래 물을 것도 없고 답할 것도 없습니다’ 하거든. 이렇게 더불어 공부하며 지내는 것이 승가의 생활이지. 어때? 이만하면 행복하지? 하하하!”
불법을 통한 생활의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님은 일반 신도들에게 신심을 가지고 법문을 많이 들을 것과 실천수행 할 것을 늘 강조한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관세음보살 화두를 잡아야 해. 부처님이 따로 있지 않아요. 아버지가 아미타불이고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세요. 항상 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관세음보살로 모시면 바로 그 어머니가 가피를 주거든. 꼭 금수사에 온다고 해서 정진이 되는 것이 아니고 금수사에 와서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가피를 받는 게 아니야. 집에서도 항상 어머니를, 아내를 관세음보살이다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불제자의 근본 정신이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새 해에는 부처님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