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 명종 13년 10월, 퇴계 이황은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그리고 고봉 기대승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청년이었다.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에 불과했다. 무려 26살 차이다. 청년 고봉은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당시의 대학자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퇴계를 찾아가, 평소 자신이 가진 철학적 소신들을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시작했다. 고봉의 이런 파격적 행동은 오로지 열정과 패기만으로 세속적 편견을 뛰어넘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더 놀라운 건 퇴계의 대응방식이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한마디로 도저히 맞대응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퇴계는 청년 고봉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어 주었다. 청년 고봉의 두려움 없는 열정을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급제를 달성하고 귀향하는 고봉에게 먼저 편지를 띄웠다. 그해 겨울 12월에 퇴계가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에 걸쳐 끝없는 애정과 상호 존중의 자세로 계속 되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바로 두 사람의 이런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반성에서부터 당시의 지성계를 뒤흔든 폭발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 역사상 이들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편지로 우정과 학문을 나눈 사실을 다시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지식인들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조선 중기 사상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옮긴이 김영두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편지는 일상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학문적 논쟁의 터전이었고 자기 성숙의 매개체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편지는 요즘 관점으로 보면, 안부 편지일 뿐 아니라 학술 논문이기도 했으며, 자기와 세상을 되돌아 보는 성찰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편지를 통해 그들의 생활뿐 아니라, 사상의 전개, 가치관, 정치적 지향 같은 다양한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삶을 가장 종합적이고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최선의 자료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한 당시 이미 몇 차례의 사화(史禍)를 겪으면서도 점차 정치적 주류로 부상하고 있던 사림(士林)의 정치적 고뇌와 의식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과, 충성스런 신하로서의 정치적 참여에 헌신하려는 포부가 함께 교차하고 있는 조선조 중기 지식인들의 고뇌 어린 대화는 그 어떤 정치 이론서보다 더 살갑게 다가온다.

퇴계와 고봉의 편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四端七情論辯)’이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질적인 논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논쟁했던 것은 인간의 심성과 선악에 대한 탐구였고,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철학적 문제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단지 한두 차례의 논쟁으로 서로의 의견을 다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수년 동안의 공부와 탐색을 통해 정밀한 철학적 개념들을 확정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서로의 다른 의견을 억측이나 권위로 강변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사색하고 토론했다는 점에서, 길이 남을 철학논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인 이 서한집은 동아시아의 다른 어떤 유교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직위와 경륜의 장애, 지역간의 한계를 모두 초월한 위대한 정신과 영혼으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란 점에서 오늘날의 우리들 가슴에 놀라운 감동을 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