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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후 9년째가 되자 케마 스님의 육체적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수술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스님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와 환자들에게 법을 설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5주 동안의 입원기간은 동분서주하며 전법에 나섰던 육신을 모처럼 쉴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중생교화에 대한 스님의 큰 원력을 짐작할 수 있다.
케마 스님은 입원기간에 두 번이나 임사(臨死) 체험을 하며 극적인 수행의 전기를 맞이 한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고 말조차 나오지 않는, 모든 기능이 정지된 것 같은 죽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케마 스님은 이 때 죽음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나 저항도 없었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의 지극한 정성을 생각할 때 그 보답으로 조금이나마 생에 대한 의지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죽음과 유사한 체험을 통해 수자상(壽者相 : 언제까지라도 장생불사할 줄로 몸에 애착을 갖는 생각)을 놓아 버릴 수 있었다는 케마 스님은 병고(病苦)가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기에 아무런 부족함도, 원하는 것도 없는 마음의 상태를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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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탁자 위에 잔의 형상을 갖추고 존재할 때 나는 이 잔을 사용합니다. 그때 이 유리는 태양 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색채를 드러내기도 하고 스푼으로 때리면 경쾌한 소리도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것이 유리잔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이미 부서진 유리일 뿐입니다.”
자신도 이미 ‘유리(相)가 깨진 것’과 같은 마음 상태에 놓여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케마 스님이 1999년 독일 붓다 하우스에서 입적하기에 앞서, 자신의 짧고 굵은 수행여정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밝힌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법문이다.
1923년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스님은 2차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 200명의 어린이 피난단에 섞여 영국으로 떠났다. 중국 상하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아버지를 잃은 케마 스님은 종전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케마 스님은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으로 명상여행을 떠나면서 출가인연의 싹을 틔웠다.
이후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케마 스님은 73년 영국의 칸티팔로(Khantipalo) 스님을 만나 비로소, 가슴으로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을 발견했다. 수행의 다섯가지 장애를 하나하나 배우고 극복해 나가면서, 케마 스님은 환희심을 느꼈다고 한다. 3년후 칸티팔로가 함께 가르침을 펴자고 권유하자 케마 스님은 79년, 55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해 스리랑카에서 니안포니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회고한 케마 스님은 사마니계를 받은 후의 안도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는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졌다. 예뻐질 필요도, 매력적일 필요도, 재미있는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가사를 걸치고 매순간 수행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8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시라이 사원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케마 스님은 1989년 독일에 ‘붓다 하우스’를 설립해 원장이 되었으며, 97년에는 독일 최초의 산림 승원인 ‘메타 비하라’를 뮌헨에 창건, 독일어로 비구계 수계식을 집전한 최초의 스님을 배출했다. 많은 비구니 제자를 양성하고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스님은 1987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대회를 주관, 불교여성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여세를 몰아 국제 불교여성단체인 사키야디타(Sakyadhita : 붓다의 딸들)를 창설하는 업적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