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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마음의 번뇌와 원망, 근심 버리고
만인을 사랑하는 마음 허공 가득 다함이 없기를.
자비로운 눈빛에 중생구제의 굳은 원력을 담고 있는 대만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회주 증엄(證嚴) 스님.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일컬어지며 대만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증엄 스님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큰 서원으로 고난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펼쳐 만세에 빛나는 구제사업을 일으켰다. 1966년 증엄 스님의 지도아래 30여 신도가 조직한 ‘불교극난(佛敎克難) 자제공덕회’가 37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400백만 명의 회원과 5개 병원, 종합대학, 방송국 등 산하시설 직원 수만 2천여 명의 조직을 갖춘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대만 토착의 일개 불교 자선기구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불가사의한 업적을 창출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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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한 신체, 무기력한 의지는 소아에 속합니다. 권태를 모르는 신체, 패기 넘치는 신념은대아에 속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소아를 망각하고 대아를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초인적인 역량으로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2개월전에 출생한 증엄 스님은 어려서부터 보살의 길을 걸을 만한 자비심을 보였다. 15세 때 어머니가 위장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만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증엄 스님은 "제 수명이 12년 줄더라도 어머니가 그만큼 오래 살길 바랍니다"고 기도했다.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모친의 병은 기적처럼 나아 수술이 필요없이 약을 먹고 완치됐다. 그러나 5년후 이번에는 부친이 뇌중풍으로 갑자기 사망, 스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다. 이때 부친의 묘소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 저곳의 절을 찾게 된 것이 불법(佛法)과의 인연을 맺게한 원인이 됐다. 뒷날 한 친구가 자운사의 수도(修道) 스님을 소개해 주었는데, 수도 스님의 지도아래 증엄 스님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인간 행복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해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여인이 한 가정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마땅히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비심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전인류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회로 확대해 천하의 중생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이러한 생명을 향한 우주적인 자비심으로 충만한 스님은 이후 몇 번의 삭발 출가가 좌절되자 조용히 수행할 곳을 찾아 대만의 북부, 중부, 동부 등으로 만행하다 마지막에는 화련현(花蓮縣) 수림향(秀林鄕) 아래 작은 절인 보명사(普明寺)에 머물게 된다. 25세 되던 해 가을, 스님은 삭발해 줄 은사가 없어 스스로 삭발한 후 본격적인 출가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1963년 2월, 증엄 스님은 타이뻬이시 임제사에서 열린 수계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은사가 없어 명부에 등록할 수 없었다. 수계식이 열리기 얼마 전 증엄 스님은 우연히 <태허(太虛) 대사 전집>을 사서 읽은 인연으로 인순(印順 : 태허 대사의 뒤를 이어 '인간불교'를 제창한 대만 불교계의 최고 원로) 대사를 뵙게 된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과 공경심으로 찾아뵈니 인순 대사는 어렵지 않게 은사가 되어주겠다고 응답했다. 수계식이 열리기 바로 전이라 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인순 대사는 증엄 스님을 위해 간단한 법문을 설했다. "너와 나의 인연이 수승(殊勝)하구나. 이왕 출가를 했으니, 매 순간 불교와 중생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
인순 대사는 간단한 스승과 제자의 예를 치르고 '증엄(證嚴)'이란 법명과 '혜장(慧璋)'이란 자(字)를 내렸다. 증엄 스님은 곧바로 임제사에 등록을 하고 삼단대계(三壇大戒 : 사미니계, 비구니계, 대승보살계를 수여하는 계단)에 참석할 수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