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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문도의 사형이자 속가 형이기도 한 탄허스님과 함께 한암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83년 탄허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참선ㆍ염불ㆍ독경 수행을 했다. 95년 한암문도회 대표, 96년 월정사 회주로 추대돼 지금까지 후학양성에 힘써왔다.
다음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인허스님 수행한담 전문.
“지금 하는 일 가벼이 말라”
“법문 청하러 왔습니다”
“경전대로 실천하면 그대로가 법문이야”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여기가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소재한 오대산(五臺山).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기록한 것처럼 신불(神佛)이 깃들어 있는 한민족의 성스러운 영지인 오대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월정사가 마음의 쉼터를 마련해 준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창건 유래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문수보살의 상주처인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일명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라고도 하는 보물 제139호 석조 보살좌상(菩薩坐像)이 대웅전 앞에 살아있는 듯 좌정한(현재는 유적발굴로 이전) 이 곳에는 근대의 고승인 한암 대선사(조계종 초대종정)의 수행가풍이 오롯이 전해내려 온다. 억수비가 내려 강원도 횡성지역에 물난리가 난 7월 23일, 한암스님의 제자인 월정사 회주 인허스님을 친견했다.
“스님, 건강하시지요. 스님께 법문을 청하러 왔습니다.”
“법문은 무슨 법문. 난 멍텅구리야. 아는 게 없어, 그만 가봐.”
“스님, 제가 근기가 낮지만, 한 말씀만 해주세요.”
“다 구업 짓는거여….”
86세의 고령이신 인허스님은 점심공양을 드신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말씀을 아끼시는 스님에게서 오랜 묵언정진은 물론 겸양의 기풍이 묻어나온다.
“스님, 1983년 입적하신 탄허 스님은 스님의 속가 형님이자 스승이신 한암스님에게서 같이 공부한 사형도 되시는데 탄허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계축생인 탄허스님은 5형제 중에 둘째였고, 나는 세 살 아래였어. 14살 때까지 4서와 서경을 깨우칠 정도로 한문에 달통했지. 17세에 장가를 드셨는데, 그후 3년간 한암스님과 도(道)를 묻는 서신왕래를 한 후 22세에 출가를 했어. 그이는 좀 특별한 데가 있어서 항상 근본자리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어. 도 자리를 아는 사람은 눈이 멀어도 천리 만리를 본다는 거여. 소소한 것이라도 근본을 모르면 필요 없다고 말하곤 했지.”2년 뒤 탄허 스님의 뒤를 이어 출가했다는 인허스님. 스님은 스무살 초발심 당시와 형님 탄허스님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으시다가 어렵게(말귀가 다소 어두우셔서) 말문을 여셨다.
“당시 절에는 전부 대처승들 뿐이었어. 선방 다니는 수좌들 빼고는 말이지. 일본인들이 경술년(1910년) 합방(일제강점) 때 비구승들을 대처승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이때 ‘주지’라는 말도 생겼어. 왜눔들이 한국 불교를 망친거야. 이승만 정권 때 대처승 7,000명을 수좌 300명이 목숨을 걸고 몰아냈어. 한국 불교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시작됐어. 폭력이 난무하고 온갖 비불교적인 일이 판을 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의 폐해로 볼 수 있어요.”오늘날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병폐인 ‘폭력’의 뿌리를 설명하는 노스님의 말씀에서 이 모든 것이 ‘과보’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스님, 가까이서 모신 한암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성격이 급했지만, 겸손하셨지.”
“스님께선 한암스님으로부터 ‘이 뭣고’ 화두를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한암스님은 평소에 어떤 가르침을 강조하셨나요?”“묵언(默言)인데 무슨 말을 해. 상원사 선방(청량선원)에선 오로지 묵언이었어. 밥 먹을 때만 입을 벙긋벙긋 했지. 처음에 방법만 일러주면 그만이었어. 경을 설하실 때는 ‘불급불완(不急不緩)’을 강조하셨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꾸준히 생각을 끊지 않고 정진하는 게 중요하다 하셨지.”한창 공부하던 시절의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는지 인허스님은 상원사 선방에서 공부하던 이야기를 자상히 해주신다. 특이한 점은 요즘과는 달리 경전도 강독한 것인데, 하루 일과를 요약하면 이랬다.
새벽 3시 목탁소리가 잠을 깨우고 밤 9시 반 죽비소리가 온갖 세상사를 잠재웠다. 새벽 5시가 사계절 똑같은 아침 공양시간이다. 방선 직후 흰 죽에 된장국으로 아침공양을 한다. 처음에는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더니 시간이 흐르자 말 그대로 만병통치약이요 꿀맛이다. 오가피차를 마시며 잠시 차담으로 여유를 갖다 보면 바로 금강경 강론 시간이다.
한암 조실스님의 지시에 따라 20대의 탄허스님이 맑은 목소리로 경의 한 대목을 읽는다. 곧 이어 조실 스님이 해석하고 구절대로 법문을 하신다. 그런데 당일 배운 것을 한눈 팔다가 외우지 못하면 입승을 보던 탄옹스님에게 종아리를 맞아야 한다.
사시(오전 9∼11시)가 되면 문수보살님께 드리는 기도에 조실 스님은 꼭 백팔염주를 돌리신다. 오후 참선시간 전에 금강경을 외우고 써야 한다. 밤 참선공부까지 숨 한번 제대로 쉴 새 없는 짧은 시간이다. 선방은 소쩍새 소리와 구름 비낀 삼왕봉에 달빛이 밀려오는 바람소리뿐 누구 하나 기침 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한암 스님이 조실로 있던 상원사 선원의 가풍은 엄격한 청규 정신에 의해 규율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틈틈이 경전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점심 공양 후 차담시간에 한암스님은 조사어록을 들고 나와 계속 법문을 했다 하니, 한국불교의 오랜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전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선(禪)에서 언어와 경전을 배타시한 것은 언어와 경전의 껍데기를 버리라는 말이지, 그 알맹이를 버리라는 게 아냐.” 인허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한암 스님이 <금강경오가해>와 <보조법어>를 현토(懸吐), 편집하여 간행하고 제자인 탄허스님에게 <신화엄경합론>을 한글로 번역토록 당부한 깊은 뜻을 알 것 같다. 인허 스님의 선교겸수에 대한 생각은 무수한 역대 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던 탄허스님의 뜻과 다름이 없었다.
“선은 돈교(頓敎)요, 교는 점교(漸敎)야.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 하나였지만 바다를 못보고, 냇물과 강물을 조금 본 것으로 무수한 주장이 생겨났어. 참선, 간경, 염불의 구경(究竟)은 똑 같아.”인허 스님은 참선은 상근기, 간경은 중근기, 염불은 하근기가 하는 방편이지만 도달점은 같다고 말한다. 참선은 새마을호, 간경은 무궁화호, 염불은 비둘기호여서 도착 시간은 다르지만 종착역은 모두 서울역이라는 것.
인허 스님은 이처럼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수행에 있어 업장 소멸은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업장이 두터워 근기에 둔탁(鈍濁)이 있더라도 염불 지송과 기도로 내생에서의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업장 소멸을 위해서는 참다운 참회가 전제돼야 한다며 인허 스님은 천수경의 ‘참회게(懺悔偈)’를 외우셨다.
“백겁 천겁 쌓인 죄업 한 생각에 없어져서 마른 풀을 불 태운 듯 흔적조차 없어지다. 죄의 실체 본래 없어 마음따라 일어난 것 마음 한번 없애보니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도 업도 없어지고 마음까지 비워지니 이것이 다름아닌 참뉘우침 자리로다.”어느 때를 정해놓고 용맹정진 하는 것은 상기병(上氣病)을 일으키기에 찬성하지 않고 평소의 꾸준한 정진을 강조했다는 한암스님의 가르침을 들려주는 인허 스님. 쉼 없이 산길을 걷다보면 정상에 오르듯이 깨달음의 길도 이와 같음을 웅변하신다.
도(道) 자리는 재미도 없고 화두 역시 맛이 없지만 무심히 정진하다 보면 무색 무취 무미의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인허 스님은 이를 ‘지음(知音)’의 경지로 표현했다. 귀와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음’. 도의 본체에 다가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자리는 언설로는 말할 수 없기에 ‘구업 짓지 말라’고만 하신다.
“젊어서 업장 소멸하고 참선해야 해. 참선도 하고 경도 읽고 염불도 하며 계정혜를 닦아야 해. 알지 못하고서 법문해선 안돼. 말을 잘못 해도 구업(口業)이지만, 상대방이 못 알아들어도 구업이야.”인허 스님이 말씀을 아끼신 까닭을 이제야 할 것 같다. 증자가 말했듯이 도는 ‘하나로 꿰뚫는 것(一以貫之)’. 도에 가까우면 말이 적어지는 이유이리라. 스님은 법문을 아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설명했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에 법문이 다 들어 있어. 경전대로 실천하면 그게 법문이야.”실천이 참다운 법문임을 설하는 인허 스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다. 착각 도인, 큰스님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참된 법문은 어떤 것이어야 할 지를 알 듯하다. 후학들을 위해 올바른 수행의 자세를 일러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스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다.
“다 자기 하기 나름이야. 그외는 구업일 뿐이지.”
최근 수행기풍이 날로 흐트러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선방 풍조에 대해 경책을 내려달라는 요청에 스님은 한참 묵묵부답하시더니, 이윽고 하시는 말씀이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야. 옛날과 지금은 근기가 달라.”그랬다. 스님이 수행하시던 50∼60년전과 지금은 천양지차였다. 절간의 방사마다 화장실과 욕실이 들어서고, 먹을 것은 풍족해졌다. 그러나 치열한 정진력은 희미해 지고, 어른을 존중하는 미풍양속마저 사라지고 있다. 절 마다 큰 부처님, 큰 법당을 만드는 대작불사를 일으키지만 도인을 배출하는 참된 불사는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란 게 스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회가 금수세상으로 갈수록 부처님 도량만은 중생들의 의지처와 삶의 올바른 지향점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야 하기에 우리 스님들이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야.”인허 스님은 고령이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지만 언제나 찾아오는 신도들과 수좌들을 기꺼이 맞으며 가르침을 펴신다. 스님은 늘 사람답게 살 것을 강조하시는데 고해에 빠져 있음에도 날로 허우적거리는 중생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이 때 한 비구니 스님과 보살이 스님을 친견하러 와 잠시 대화가 중단됐다. 안부인사를 받은 후 스님은 하던 말씀을 계속했다.)“개벽과 같은 대전환이 필요해. 총과 칼이 사라지고 신명(神明)이 악인을 벌하는 그런 시대가 오려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 그럴려면 부디 바르게 살아야지. 대장부로서 뜻을 세워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려면, 헛되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되겠느냐는 말이지.”다시 한번 출·재가 수행자를 위한 가르침을 청하자 인허 스님은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에 수록된 한산시를 기억을 되살려 외우시며 옛 선사들의 각고(刻苦) 정진(精進)을 따르라고 하신다.
男兒大丈夫 作事莫莽勞(남아대장부 작사막망노)
勁挻鐵石心 直取菩提路(경연철석심 직취보리로)
邪路不用行 行之枉辛苦(사로불용행 행지왕신고)
不要求佛果 識取心王主(불요구불과 식취심왕주)
사내 대장부들이여! 하는 일을 가벼이 말라!
철석 같은 마음 굳게 세워, 곧바로 보리의 길로 ...
사특한 길을 걷지 말라! 그 길엔 고통 뿐이리.
굳이 불과(佛果)를 구하려 말고, 마음의 주인을 깨달아라.
오직 대도(大道)의 길, 보리(菩提)의 길을 향하여 정진하는 이들에게 들려 주는 간곡한 법문. 결과와 목적에 대한 집착으로 불과(佛果)를 구하지 말라는 경책이 하산 길 내내 여운으로 남는다.
인허스님은?
후학제접 항상 겸손‘오대산의 자비보살’
같은 한암 문도(門徒)의 사형이자 속가 형이기도 한 탄허 스님과 함께 한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인허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산맥인 한암·탄허 두 스님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한암 대선사의 선지(禪旨)와 당대의 대강백이자 학승인 탄허 스님의 교학을 가까이서 심득한 인허 스님은 두 선사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정진을 닦았다.
191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스님은 탄허 스님이 출가한 2년 뒤인 36년 상원사로 입산, 39년 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39년 월정사 강원을 수료한 뒤 45년 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51년 한암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정진했다.
83년 탄허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그 그늘에서 묵묵히 참선, 독경, 염불의 정진을 계속해 온 인허 스님은 95년 한암문도회 대표로 추대되었으며, 96년 월정사 회주로 추대돼 후학 양성에 정성을 쏟고 있다.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예불에 이은 독경, 참선을 멈추지 않는 인허스님은 항상 겸손하고 온화한 자세로 후학들을 제접, 오대산의 자비보살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