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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님은 20세에 카규파의 고승 밀라레빠의 전기를 읽은 후,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막 영국에 도착한 트룽파 린포체를 만나 명상을 배운다. 64년 8대 캄트롤(Khamtrul) 활불(活佛)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은 서구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76년부터 12년간 히말라야 석굴에서 수행해 득력(得力)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1988년 이태리 아사시로 가서 5년간 전법활동을 펼친 팔모 스님은 인도로 돌아와 1999년 드룩파 카규 전통을 잇는 비구니 사원을 창건한다. 교육여건이 열악한 네팔, 티베트, 인도지역에서 온 여성들을 지적, 영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각국에서 모금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님은 이들에게 불교 철학과 수행, 티베트어, 의식, 영어 등을 공부시켜 불교 여성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그들 중 일부에게는 전통 불교미술과 재봉 기술을 배워 불교 공예품 등을 만들 수 있는 기술도 가르치고 있다.
1998년 자서전 <눈속의 석굴(Cave in the Snow)>, 2002년 <산중 호수에 비친 그림자(Reflections on a Mountain Lake)>를 펴낸 텐진 팔모 스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말라야 석굴에서의 목숨을 건 정진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76년 인도 북부의 타시종이란 마을에서 캄트롤 린포체의 지도와 보호를 받으며 홀로 석굴 정진에 들어간 팔모 스님은 눈이 많이 내리는 11월부터 이듬해 오뉴월까지 집중적인 명상을 했다. 그리고 오뉴월에 눈이 녹으면 채소를 가꾸거나 땔나무를 마련하고 생필품을 마련으며, 때때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독경과 불화 그리기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몇 달 뒤 다시 10월이 오면 스승께 지도를 받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곤 했는데, 이 시간에도 아침, 저녁의 명상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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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일정의 리듬을 깨지 않는 것, 자신에게 명상을 해야 할지 말지를 묻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수행 자체에 탄력과 활력이 붙게 되고 이후에는 수행이 절로 되는 것이다.”
석굴에서 정진하던 어느해 겨울, 눈보라가 7일간 내린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라훌 지역의 여러 마을이 눈사태로 파괴되거나 고립되었고, 팔모 스님이 수행하던 석굴에도 수십 톤의 눈더미가 덮쳤다. 굴안을 덥혀주던 난로는 굴뚝이 부서져 불을 피울 수 없었으며, 칠흙같은 어둠과 추위 속에서 점점 희박해져가는 공기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팔모 스님은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스승 캄트롤 린포체께 기도를 올렸다.
“중음(中陰:죽음이후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의 과정)에서 저를 보호하고 인도해주십시오.”
이때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굴 입구에 쌓인 눈을 뚫고 밖으로 나가라.”
팔모 스님은 깜깜한 굴문 앞을 가로막은 빙벽을 깨기 시작했다. 석굴 안에는 곧 눈이 가득찼다. 얼마나 그렇게 빙벽을 깨어나갔을까. 앞쪽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조금씩 밝아졌다. 드디어 극적으로 바깥 세상을 보게 된 스님은 깜짝 놀랐다. 석굴도 나무도 다 사라진 것이다. 오직 천지가 하얀 벌판이었다. 드디어 기나 긴 각고의 토굴 정진이 ‘깨달음(enlightment)’이라는 열매를 가져다 준 순간이었다.
불자들은 팔모 스님에게, 용맹정진하던 시절과 동규 가찰 링 사원을 짓고 비구니 양성을 위해 순회 모금강연을 하는 요즘을 비교할 때 언제가 좋은지를 질문하곤 한다. 이 때마다 팔모 스님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겸하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이란 생각에, “개인적으로는 조용히 정진하는 것이 좋지만 수행과 포교가 모두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수행자는 홀로 정진할 때 잡다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겨를이 없어 발전이 빠릅니다. 반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는 혼자 있을 때는 기르기 힘든 덕성을 배울 수 있어요. 보시하는 마음, 인내심, 자비심 같은 것들은 인간관계 속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들숨과 날숨처럼 이 두 가지 생활은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팔모 스님은 수술에 임한 외과의사처럼 한 곳에 집중하는 동시에 허공처럼 넓고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여유있는 마음의 큰 틀속에서 매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알아채는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즈끼 순류 선사의 “키우고 있는 소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광대한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선어록을 인용하면서, 우리 마음 역시 짧은 끈에 매어두지 말고 드넓은 초원에 방목하라고 조언한다.
팔모 스님은 또한 좌선과 생활이 하나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불교란 우리 마음과 삶을 바꾸려는 것이기에, 수행은 삶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깨어있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선입견 없는 눈으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할 때 몽유병자처럼 살아가는 삶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 입적한 스승 캄트롤 린포체의 유언에 따라, 92년 주석하던 타시종 사원에서 나와 동규 가찰 링 비구니 사원을 건립한 팔모 스님은 재가 여성불자를 위한 국제여성수행센터 설립을 위해 오늘도 모금활동을 펼치고 있다. 티베트불교 비구니를 대표하는 팔모 스님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티베트 및 남방불교권의 비구니 수행을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전세계로 전법여행과 모금활동을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