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신분체제를 양반·중인·상인·천민의 네 계층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이들을 다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묶어본다면 양반 사대부와 평민으로 나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권층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반대로 평민들은 의병을 일으켜서 제 고향을 지켰다. 집권층의 무능력과 허세가 드러나고 상대적으로 눌려 지내던 평민들의 세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양반들만 사회의 주체이던 시대가 지나고, 평민들도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입신출세를 위해 시를 짓던 양반들과 달리 평민 시인들이 자기네 삶을 한문학의 형식으로 표출하는가 하면, 남다르게 살았던 평민들의 삶을 전(傳)의 형식으로 서술해 남기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이로써 평민 전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역사와 인간 탐구가 함께 있는 새로운 역사읽기. 최근 나온 <평민열전>은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개인사 속에서 삶의 철학을 건져 올린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는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등과 기생 황진이와 칼 만드는 장인 신아 등 시인, 화가, 서예, 의원, 역관, 의협, 처사·선비, 바둑, 충렬, 장인, 효자, 효녀, 절부·열녀, 기생·궁녀 등으로 분류한 평민 110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짧은 지면 안에서 그 인물의 남다른 삶을 최대한 부각시킨 ‘열전(列傳)’이라는 형식은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한 인간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라, 전해야 할 사건만 간결한 문체로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 속에는 인간과 시대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담겨져 있다. 행장이나 연보, 묘비명까지 있는데도 굳이 전을 다시 짓는 까닭은 사실의 기록이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인간성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조선시대 평민 한문학을 연구해 온 연세대 국문과 허경진 교수가 펴냈다. 평민 출신의 화가 조희룡이 1844년에 지은 평민전기집 <호산외기>, 아전 출신의 유재건이 1862년에 엮은 <이향견문록>, 그들의 친구였던 시인 이경민이 1866년에 엮은 <희조질사> 등 세권의 전기집을 중심으로 엮었다. 조희룡과 유재건, 이경민 등은 자신들의 안목과 기준에 의해서,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을 짓거나 인용했으니, 사실적인 기록에 가까운 글들이다. <호산외기>는 요즘의 역사계에서도 하나의 역사책으로 인정할 정도로 가치가 높다.
이 책은 사건 중심의 기존 역사서들과 달리 비범했던 19세기 평민들의 삶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는 측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19세기 평민 110인에 대한 이야기
평민열전
허경진 편역
웅진북스, 1만 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