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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원스님은 11월 29일 동국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임의사를 밝힌 뒤, “올해 12월로 예정된 일산불교병원의 개원을 보고 물러나리라 생각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병원 개원이 어렵게 돼 본의 아니게 불자들에게 실망과 우려를 드리게 돼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동국대는 지금 불교병원의 순조로운 개원과 후임 총장 선임 등 매우 중요한 시점에 처해있다”며 “나의 사임이 이런 난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현명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후임 이사장이 선임될 때까지 동국학원 정관 제28조 1항에 의거 12월 20일부터는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이 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아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녹원스님은 지난 85년 동국학원 이사장에 선임된 이래 네 차례 연임해 왔으나, 지난 2월 이사회가 재단 관리부실에 따른 책임을 물어 올 12월까지 용퇴할 것을 결의했었다.
김원우 기자
wwkim@buddhapia.com
다음은 녹원스님이 최근 본지 임연태 뉴미디어부장과 가진 인터뷰 전문이다.
“수행으로 지혜 쌓고 선행으로 복 짓길....”
남산의 나무들이 그 무성하던 잎들을 다 떨구어 내고 알 몸으로 겨울을 지탱하고 있다. 산도 덧칠했던 모든 것을 털어내 버리고 골격만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 비울 것을 비울 줄 아는 자연의 지혜는 동국대학교의 겨울 풍경을 연출해 내는 중요한 뒷그림이다.
지난 15년간 (재)동국학원의 이사장직을 맡아 왔던 녹원스님. 11월 29일 오후 4시 스님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사장직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0여일이 지난 후 동국대 본관 이사장실에서 녹원스님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버린 후의 마음은 어떠하실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란 올 때나 갈 때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라 오고가는 것이기에 세상의 변화에 따라 오고 가는 상황의 차이는 있어도 본래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동국대학에서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 했고 이룬 것도 많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게 주어진 일을 했으니 이제 자리를 비워 주어야 뒷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일산병원도 내가 개원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렸어요. 내가 할 수 있는만큼은 했으니 거기에 자족하고 다른 분이 더 지혜롭게 개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임을 믿기에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소유하고 있을 때 집착하지 않았기에 버린 후에 아쉬울 게 없는 것이 선사들의 가풍이다. 1968년부터 32년 간 이사직을 맡았고 그 절반인 15년은 이사장 소임을 맡아 공심(公心)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 해 왔던 녹원스님은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도 교육불사의 한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1984년 종단이 어려움(분규)에 봉착했을 때 해인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렸었다. 산중공사를 통해 녹원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의가 됐는데 녹원스님은 승려대회 후에 그 사실을 통고 받았었다. 몇 번을 고사하려 했지만 종도들이 뜻을 모아 결정한 것을 외면하는 것도 종도로서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에 총무원장직을 맡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총무원 부장급 스님들과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이제 원장직을 내놓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다음날 표연히 황악산으로 돌아 갔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1년 이상 지키기 어려운 종단 상황에서 2년간 종단을 안정 시킨 현직 총무원장이 특별한 분규나 외압도 없이 스스로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으므로. 스님은 엷게 웃으면서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느냐”고 했지만 그 때의 아음과 지금의 마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똑 같아요.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종도로서 일이 주어지면 당연히 해야하고 그 일을 다 했다 싶으면 또 다른 일을 위해 자리를 옮겨 가는 것이 순리니까요. 그 때 총무원장을 맡은 동기가 승려대회라는 초법적인 논의구조였기에 그 긴박한 상황이 정리된 후에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동국대 이사장직을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985년 처음 맡은 것도 내 의지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었습니다. 당시 학교는 상당히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총장과 이사장이 다 학교행정을 더 이상 총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동국대학이 운동권 학생들의 주요 거점으로 지목되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 와중에 청와대 행정수석 이 아무개씨가 찾아 와서 ‘이사장을 맡아 학교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동국대 동문인데 애교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맡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의과대학의 신설과 병원설립(원래는 전국 각 도(道)마다 불교병원을 하나씩 세우는 것이었지만), 불교방송국 설립, 경찰포교의 현실화 등 원력을 세운 일들이 어느정도 이루어 졌습니다. 부처님의 은혜라 할 수 있겠지요.”
녹원스님은 30년이 넘도록 교육불사의 현장을 뛰었지만 사실 황악산 직지사를 오늘의 사격으로 일신시킨 장본이이기도 하다. 가람불사에도 꼬박 30년을 진력했었다. 처음 출가할 때 그러니까 1941년 이후 20여 년 간 직지사는 공부하러 들어오는 학생들이 들고 오는 쌀말에 의존하는 정도의 살림살이였다. 400년 전 사명대사가 출가를 한 거찰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1957년 직지사가 교구본사로 승격되고 이듬해 본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실상 직지사를 중창하려는 녹원스님의 행보는 거침없이 벋어 나갔다. 교구본사 승격을 기해 1천일기도를 입재하며 절의 외형을 확대하고 내실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직지사는 녹원스님에게 고향보다 각별한 마음의 고향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람불사와 교육불사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했을까?
“불사는 모두가 한 불사입니다. 부처님의 일이란게 뭡니까? 부처님을 위하는 일이 불사고 만중생이 부처님의 종자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 부처님 일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 부처님을 이롭게하는 일이고 부처님을 이롭게 해야 시방법계가 안락한 겁니다.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교육불사도 가람불사도 다 부처를 위하고 중생을 위한 일이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어요. 그 불사를 통해 좋은 인연을 짓고 복을 지어 지혜의 종자를 심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 불사 잘 한 사람이겠지요.”
지난 여름 녹원스님은 두툼한 책 한권을 출간했다. 교육불사 현장을 종횡무진 달려 온 궤적(軌跡)들을 담은 <불교와 교육문화>다. 각종 행사에서의 연설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 책의 핵심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스님의 친절한 당부가 곳곳에 묻어 있다. 스님은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선행을 통해 복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겹겹이 당부한다. 스님의 상좌들은 물론이고 가까이서 스님을 모셔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한결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을 복혜양족존(福慧兩足尊)이라 하지 않습니까? 복과 지혜를 함께 지닌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지혜를 얻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복을 짓는 선행을 즐거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고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며 나라의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공부가 수승해 그 힘으로 여러 중생을 제도한다면 그 자리가 극락입니다. 제도를 받을 것이냐, 제도 할 것이냐. 누구에게나 이 두 길은 열려 있습니다. 어느 길에 서는 것이 좋겠습니까?”
다른 스님들에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녹원스님은 어느 스님보다 상좌들에게 엄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어린 학생들의 팔둑에 연비를 하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지?”하며 격려하는 그 따스함을 상좌들은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작은 실수에도 모진 질책을 하는 스승의 ‘깊은 정’을 모르는 상좌도 없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제자를 사랑하지 않는 스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보호해주고 매사를 이해해 주면 유약해집니다. 나 역시 스승에게 엄하게 교육 받았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부족해서인지 늘 제자들이 부족해 보입니다. 나보다 잘 하라는 격려가 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엄하고자 엄해지는 것은 아니예요.”
오랜 시간 지켜 온 자리를 털고 일어나 녹원 스님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산으로 돌아가면 산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냥 양식만 축내며 지내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백장선사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산에 돌아가서도 수행과 포교의 본분사에 열중하고 대중외호도 해야지요.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거나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조차 분간 못하는 사람은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쉽고를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입니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슨 일에든 용기를 낼 것입니다. 학교를 떠나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겨울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어 낸채 또 한 켜의 나이테를 만들어 내고, 겨울산은 골격만으로 남아 새봄의 힘찬 기운을 안으로 축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녹원스님은?
1928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아랫마을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오인갑(吳仁甲) 법호는 영허(暎虛). 1941년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해 탄옹(炭翁)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직지사 강원에서 이력을 마치고 선학원과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안거를 했다. 1948년 한암대종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보문선원과 천불선원에서 수선안거를 계속했다.
1964년부터 20여년 간 학교법인 능인학원의 감사, 이사, 이사장을 지냈으며 1968년부터 74년까지 동국학원 이사를, 76년부터 현재까지 동국학원 이사를 역임하는 가운데 1985년부터 2002년 12월 19일까지는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동국대의 내적 성장을 기해 학과신설과 건물신축, 부대시설과 산하 기관의 꾸준한 확대를 이끌었으며 일본, 중국, 미국, 호주 등의 유수 대학들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세계적인 불교학의 산실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불교병원 건립에 매진해 경주, 포항, 분당, 강남에 이어 일산에 초대형불교종합병원을 준공했다.
정화불사때부터 종단일에 투신했으며 1957년 직지사가 교구본사로 승격된 이후 첫 주지직을 맡아 중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30여년 간 계속된 중창불사를 통해 직지사는 오늘의 사격을 이루었다. 종회의장, 총무원장 등 종단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종단의 화합과 발전에도 기여했다. 각급 종립학교와 직지사 연수원을 통해 수만명에게 수계를 했으며 키르키즈 공화국과 스리란카 국립 프리베나 대학 등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임연태 뉴미디어 부장
ytlim@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