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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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문화원 이인호 원장
“그림,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은 공통점이 있어요.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욕심을 없애야 일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어요. 잘 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르치게 되지요. 무욕의 마음으로 붓을 휘둘러야 세찬 기운이 넘쳐납니다.”

불화가 이인호 거사(67, 익산문화원장)가 고희를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힘찬 필력을 과시할 수 있는 비결이다. 47년간 불화와 단청을 그려오면서 불심을 자연스럽게 예술로 승화시킨 원로 불모 이인호 원장은 10종 80기의 예인으로 알려져 있다.

주종목인 단청과 불화는 물론 불상조각, 도자기, 승무, 법고, 종이공예, 궁중요리 등 흔히 전통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손에 안잡아 본 일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그냥 호기심에서 취미 삼아 가볍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 다 발표회를 가질 정도의 프로급 수준이다.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게 예술의 속성인데 이 원장이 10가지 이상의 장르를 수준급으로 넘나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동진 출가였다. 이 원장은 태어나던 날 자신의 단명을 예고한 금산사 소진산 스님의 권유로 7세때 불가에 귀의했다. 이후 20여년간 금산사 금어(최고 경지에 이른 단청장)였던 소진산 스님의 시자 노릇을 하며 불화와 단청, 한지공예, 사찰음식 등 불교문화 전반에 관한 공력을 키웠다.

“사찰은 불교예술이 모두 공존하는 종합무대입니다. 당시에는 절 살림이 어려워 모든 일을 외부의 도움없이 스님들 스스로 자급자족 하던 시절이지요. 20년 승려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전반적인 불교문화에 대해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27세에 환속한 이 원장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경산 스님에게 ‘인도(引導)’ 란 법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불모로서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백 가지 형상의 달마, 기하학을 도입한 백 가지의 단청본 … 등.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가꿔나갔다.

근엄한 달마의 모습이 불자들에게 혹여 거부감을 일으킬까 봐 고운 색채를 입히기도 했다. 특히 이 원장의 단청은 옛 단청을 응용한 창의력이 돋보이며, 대형 탱화와 벽화의 관음도 등은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우아미를 지녔다. 금단청 솜씨는 이때부터 이미 국내 일인자로 평가받을 정도다.

이 원장은 “어떻게 하면 불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일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며 “좌우상하 어디서 보든 벽화를 보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시선이 따라 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화두는 71년 수원 용주사 단청과 벽화를 그리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대웅전에 걸린 단원 김홍도의 후불탱화를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입체적인 감각을 관찰했고, 비로소 그가 원하는 기교를 얻어냈다.

“기교와 기술은 오랜 관록이 쌓이면 저절로 생겨납니다. 하지만 수많은 부처님을 그림 속에 탄생시키는 불모의 경지는 일념이 없으면 절대로 오를 수 없지요. 항상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붓끝에 모을 때 비로소 일체의 잡념이 걷히고 일념이 남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59년 남산 팔각정을 시작으로 공주 마곡사, 아산 현충사, 수원 용주사, 서울 화계사, 밀양 표충사, 고성 건봉사 등 수십여 사찰에 그의 손길이 남아 있다. 89년 고향인 익산시 금마로 낙향해서는 7공수여단의 군법당 단청도 해 주었다.

불모의 길과 함께 이 원장이 평생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인간문화재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받은 승무와 법고였다.

“춤 한 동작 한 몸짓은 한 순간이어서 그냥 허공에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아름답고 화려한 춤을 보여 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무대에 서면 그냥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 걸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한 완벽한 춤은 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영원히 각인되고 그 감동은 평생을 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육체를 움직이지만 사실은 영혼으로 추는 것이 바로 승무입니다.”

이런 경지에 올라서일까. 지난 12월 5일 익산시민회관에서 열린 인간문화재 명인명창 초청 ‘송년 국악한마당’에서도 법고를 직접 두드리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 열정만큼은 젊은이 못지 않다.

77년 한국불교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84년 익산군민상 수상, 96년 서울신문사 문화인상 , 올 11월 문화관광부 장관상 수상 등 두평 남짓한 방에 가득찬 상패와 트로피를 보며 화려한 인생을 산 그에게도 후회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국내외 40여차례의 개인전과 80여명의 제자도 배출하는 등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곁에서 성불을 이루겠다는 출가의 약속을 중도에 포기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도 불모의 길을 평생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원장은 내년 8월 직접 설립한 뒤 12년간 지켜왔던 익산문화원장의 자리를 후배에게 내 줄 예정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15년 보금자리인 예도원에서 달마도 등 불교미술을 소재로한 관광소품 제작 개발로 50여년간의 불모 인생을 회향하겠다고 한다.

김주일 기자
jikim@buddhapia.com





200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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