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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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검사직 내놓고 법문집 번역한 최순용 변호사
국가 또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공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져온 검사. 특히 ‘검찰의 꽃’이라고 하는 부장검사는 소시민들에게는 공익의 수호자로서 보다는 권력의 상징처럼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부장검사’라는 이런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이것을 일순간에 벗어놓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권력이 어떤 것인가? 부와 명예가 저절로 따라오는, 그 어떤 탐욕보다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강력한 유혹아닌가.

그러나 최순용(39, 동국대 겸임교수) 변호사에게 있어서 ‘부장검사’라는 직함은 뿌리칠 수 없는 권력도, 명예도 아니었다.

“부처님 법을 알면 알 수록 검사라는 직업이 내게는 적합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익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거친 업무상 남에게 안좋은 말도 하게 되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수행 시간을 좀더 갖고, 강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부장검사직을 그만두었지요.”

최 변호사에게 ‘부장검사’직을 그만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권력과 명예를 포기한다는 고민이나, 갈등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불교공부가 무르익어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뿐이었다.

서울 농대교수를 지낸 아버님이 법조인이 되길 원해 고시공부를 하고 검사가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언제나 수행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81년 대일고를 졸업할 즈음, 예비고사를 준비하다 우연히 접한 불교 책들. 학교앞 고서점에서 손때 묻은 <불교개론>과 <반야심경>을 읽은 것이 불교에 흠뻑 빠진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법과대에 들어가서도 불교 책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조계사와 수선회, 금강경독송회, 한마음선원, 강남포교원, 보리수선원 등 인연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듣고 수행도 해보았다.

서울대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서도 반야회 총무를 2년간 맡아 50여 연수원생들의 신행을 이끌었다.

검사로 활동하는 한편, 무엇이 올바른 불교 수행법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98년 1년간 유학한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에서 고타마 붓다가 설한 근본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에 눈뜨게 된 전기를 맞았다.

외국에서는 한국처럼 간화선 일변도가 아닌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에 따라 부처님의 수행법을 차근차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99년 근본불교 명상수행모임인 연방죽선원의 법주 스님을 만난 이후,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에 이른 수행법인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 출입식념 즉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와 사티파타나(Satipatana, 자신의 몸(身) 감각(覺) 마음(心) 법(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사념처(四念處))에 근거한 수행을 꾸준히 실천하면서 검사직을 자연히 놓게 되었다.

특히 지난 5월 한달간, 연방죽선원에 머물며 수행지도를 해준 미얀마의 고승 우 조티카 스님(U jotika sayadow)을 가까이서 모시고 수행한 것이 검사직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 조티카 스님으로부터 집중적인 위빠사나 지도를 받은 후 곧바로, 서울지검 북부지청 부부장검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했다. 이어 8월부터 우 조티카 스님의 법문집 을 번역한 것은 담마 공부의 깊이를 더해준 계기가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 조티카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평정심을 가진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몇 달 뒤 스님의 보석같은 법문집을 접한 후, 진지하게 담마(Dhamma, 法)의 길을 가는 구도의 심정으로 분주한 생활 중에 매일 조금씩 스님의 말씀을 번역해 이제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최 변호사는 그간의 번역작업을 ‘진흙 속에서 보석 알을 캐내는 일’에 비유했다. 그 보석 알은 부처님께서 설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것임을 재확인하고, 자신 역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진리의 길을 걸으리라 다짐했다.

우 조티카 스님의 말처럼, 이제 그는 남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길은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최 변호사의 삶은 부장검사직을 그만 둔 이전부터, 수원 용화사 부신도회장을 맡고 있는 어머니 조본연심(66) 보살의 가르침대로 늘 불교와 함께 있었다.

90년부터 3년간 육군 법무관 생활을 하며 21사단 군법당을 후원했으며, 93년부터 대전지검을 거쳐 서울지검, 전주지검, 서울지검 북부지청 검사로 부임해서는 문화재 전문검사로 명성을 날렸다.

전주지검에 재직시에는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문화재 밀매단을 적발하고, 도난 당한 불교문화재를 회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계종으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96년 2월부터 99년 8월까지 서울지검에 근무할 당시, 대검찰청 압수물 창고에는 성보박물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문화재급 유물들이 들어찼다.

서울지검 713호실은 최 검사의 직무실이자, 전국 시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재 전문 검사들의 '사령부'였다. 바로 이곳에서 최 검사를 중심 축으로, 검경찰 및 문화재관리국의 사범단속반 등으로 구성된 '문화재 전담반'이 수개월동안 도굴범 등을 조사, 추적해 성보문화재 33점등 시가 1백억원대 문화재 200여점을 되찾은 성과를 올린 것이다.

변호사로서, 교수로서 새 삶을 시작한 그는 요즘 어느 때 보다 행복하다. 지난 9월부터 동국대 겸임교수에 임명돼, 형법학을 가르치는 틈틈이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 마냥 즐겁다.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씩 정진하는 시간도 생겼고, 언제 어느 때나 깨어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 sati(마음챙김) 수행입니다.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보다 소중한 일이 있을까요?”

최 변호사는 앞으로도 틈틈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번역 및 집필 작업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불교강연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200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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