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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부터 28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아름다움과 깨달음-한국 근ㆍ현대 미술에 나타난 불교사상전’에 서양화가 이만익씨(64)가 참여한 이유다.
단구에 헝클어진 머리, 짧지만 짙은 콧수염 등의 외모와 ‘한국적’‘민화적’‘문학적’인 독특한 화풍으로 알려진 이씨는 요즘 새로운 화두에 천착했다.
‘왜 불교미술중 국보는 옛 것이어야만 할까’다.
이씨는 “근현대 불교미술품중 어디 국보가 있습디까? 불교의 현대화, 세계화를 외치고 있는 마당에 이제 한두개 정도의 국보급 미술품을 불교계가 작가들의 힘을 빌려 양산해 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반문한다.
그동안 통도사, 선암사, 송광사 등 불교유물이 많은 절은 어김없이 그의 화판에 등장했다. 감은사지석탑, 석굴암 본존불, 미륵반가사유상, 백제관음 등 수많은 불상도 화폭에 담아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교미술만을 고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10여년간 고교 미술교사 생활을 하다 73년 돌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2년 후에 돌아온 후부터 서양 첨단미술의 흉내가 아니라 거꾸로 조선조의 민화를 연상시키는 ‘한국적’ 그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아무리 봐도 정겹다. 찬란한 원색에 둥글둥글한 선은 보는 이에게 안도감을 준다. 그의 그림엔 오순도순 어깨를 맞대고 둘러앉은 가족이 있고 흰 한복을 입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있다. 승무를 추는 보살, 하늘을 나는 학과 소나무까지 그의 윤곽선 굵은 그림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고구려 건국신화 심청전 춘향전같은 판소리, 탈춤도 곧잘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은 원색으로 표현한 한국적 설화의 세계다.
대표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2000년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26번째 개인전 도록을 건넨다. 지난 95년 예술의 전당에서 화업 40년 회고전을 연 이후 5년만에 갖는 국내전으로 회고전 이후의 신작들을 모은 전시회였다. 총 50여점중 1000호짜리 탈놀이등 500호가 넘는 대작도 8점이나 된다.
한국적 정서를 그렸다는 점에서는 과거 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추상성이 강해졌고 선이 좀더 자유로워졌으며 무엇보다 불교를 소재로 한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 ‘석굴암본존불’은 청색과 적색의 제한된 색채 등에서 우리민족 최고의 미술품을 화판에 이관시키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백제관음’, ‘삼불’, ‘산사’, ‘행려관음도’등 이 작가가 큰 모험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불교 소재가 많았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찾다보니 숙명적으로 다루어야 했던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래서 틈만나면 화구를 꾸려 전국의 산사를 돌아다녔지요. 무엇을 그린다는 욕심에서 벗어나 ‘비천도’를 그릴때면 내 자신이 구름위를 날아가고, ‘관음도’를 스케치할때면 이미 내 자신의 몸이 관음이 된 듯한 상상을 했습니다. 그리려고 하는 그림과 손끝의 붓 그리고 화판앞에 앉은 내 마음이 따로 떨어져 있으면 좋은 그림이 안 나오기 때문이죠.”
이 작가의‘이만익 스타일’정착은 80년대 초반 3년여에 걸쳐 문학잡지 ‘현대문학’에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연재했던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시기에 단순하고 명쾌한 굵은 선이나 주홍색 색감이 자기 스타일로 양식화 했다.
‘스타일’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기는 주제인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작품의 내용 역시 이 시기에 정착됐다. 오랫동안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우리의 생활양식이나 역사서인 ‘삼국유사’, 고구려 건국신화등에서 모티브를 따와 이에 현대적 조형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설화 이외에 탈춤 판소리등에 나오는 해학과 가락, 정한의 분위기가 ‘이만익 風(풍)’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작가는 단순히 화폭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특히 몇해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명성황후’의 포스터에도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한 이만익씨의 명성황후가 그려져 있다. 또 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문화행사에서 무대와 의상 소도구등의 색채 코디네이션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막 쉰줄에 들어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때인지라,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거의 1년반을 그림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려보겠느냐' 싶어 일을 맡았다.”라는 이 작가는 이 일을 계기로 또 한번의 변신을 했다. 이후 작품에 생동감이 많아 졌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작가는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에서 개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방이나 흉내는 작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지요. 전업작가이기 때문에 제자를 키우는 일은 안하고 있지만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들이 이 점을 강조했으면 합니다.”
몇 달전 발목을 다쳐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 말고는 아직도 건강에 자신있다는 이 작가는 “불교계의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불교미술의 현대화에 한 몫 기여할 수 있는 대작불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속내를 밝히며 남해안 스케치 여행을 위해 급히 화구를 꾸려 길을 나선다.
김주일 기자
jikim@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