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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터 석탑 해체 1년 맞은 드잡이 기능자 홍정수씨
가을 황사가 전국을 뒤덮은 지난 11월 11일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석탑(국보 11호) 해체 보수 현장. 가로 50m 세로 30m 높이 30m 규모의 가설덧집 안에선 두 명의 석공이 시멘트를 떼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덧댄 시멘트를 제거하는 일은 이번 해체 보수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1400년을 버텨 온 돌이 시멘트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일이 정으로 쪼고 있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두 사람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던 홍정수(문화재 드잡이 기능자 190호ㆍ63)씨는 대뜸 석탑 내부의 적심 구조를 가리키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3층 지붕돌(옥개석)과 지붕 받침돌(옥개 받침)을 들어내 보니 가지런히 채워져 있어야 할 내부 적심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것 좀 보세요. 무너져 내린 부재를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버렸어요. 그것마저 깨뜨려서 다 채워버렸으니…, 다시 쓸 수 있는 부재들도 많았을 텐데…. 자기들 문화재가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홀대한 게 틀림없어요."

못내 아쉬움이 흘러나온다. 우리 나라 최고(最高) 최대(最大) 석탑인 미륵사터 석탑에 드리워진 일제의 그림자는, 겉으로 드러난 시멘트보다 더 심각한 2차적 훼손이 있었던 것이다.

미륵사터 해체 보수 공사에서 홍정수씨는 '특별한' 존재다. 1년 전인 지난 해 10월 31일 해체 보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에서 탑에 첫 손을 댄 사람이 바로 40년 경력의 '드잡이' 홍씨였다. 3층 지붕 받침돌까지 해체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부재 하나라도 홍씨의 손을 거치고서야 탑을 빠져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들어낸 석재는 180여 개. 보통 석탑의 경우 내부 적심을 포함해서 150개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미륵사터 석탑은 해체해야 할 부재 수를 3000개로 추산하고 있으니 이제 시작인 셈이다. 작은 돌은 무게가 200~300kg, 옥개석의 경우 2톤을 넘기도 한다.

"생각보다 부식이 많이 되어 큰일이에요. 동탑 복원 때를 생각하면 최소한 50%는 원래 부재를 써야 제대로 된 복원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작은 흠집 하나도 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른 때보다 신경이 더 많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10톤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홍씨는 요즘 아내와도 별거중이다. 본격적인 해체가 시작된 올 2월, 자신이 손수 만든 거중기와 보수대, 쌍보수대, 도르래 등 장비들을 갖고 아예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다. 두 달 전에는 휴대전화마저 없애 버렸다. "일 때문에 여기저기 전화가 오지만 그 때마다 거절하기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드잡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미륵사터 석탑은 늘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 탑을 내가 맡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석탑을 맡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이것 하나 제대로 마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홍 아무개가 저 일을 했는데 정말 튼튼하게 했다'는 소리는 들어야지요."

홍씨가 드잡이 일에 입문한 것은 5~60년대 당대 최고의 드잡이였던 매형 김천석(작고)씨 때문이었다. "55년도인가, 시골(전남 여수)에서 올라와 남대문에서 행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유일한 드잡이였던 매형의 권유로 드잡이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59년 동묘 보수 공사 때부터 본격적인 드잡이 길로 들어섰으니 벌써 40년이 넘었네요."

그 동안 매형에게서 독립해 처음 일을 맡았던 64년 남한산성 보수 사업을 비롯해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일을 했다. 남대문,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 불국사, 석굴암,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구례 화엄사 동오층석탑,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 등 웬만한 국보급 문화재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석탑만 족히 100기는 들었다 내렸다.

"당시만 해도 저처럼 거중기나 보수대, 쌍보수대, 도르래 등을 갖춘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보수 의뢰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요즘도 산 속 깊은 절터 같이 기계 장비가 들어가기 힘든 곳에는 손수 만든 장비를 갖고 갑니다."

드잡이 하면 거중기나 도르래 등을 이용해 무거운 돌이나 기둥을 옮기고 들어서 다시 맞추는 일을 하는 전통 건축 기술자를 말한다.

탑이 대표적이지만 꼭 그것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 목조건축물의 기둥이나 보, 추녀 같이 덩치가 큰 나무를 세우는 것도 드잡이가 할 일이었다.

석불이나 마애불, 담장이나 성곽 보수도 그의 몫이었다. 요즘은 기중기가 있어 드잡이가 따로 필요 없을 때도 많다고 한다.

"70년대에는 일감도 많았는데,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벌이가 안 돼 이 일만 해서는 못 살았죠. 때로는 석공일도 해야 하고…. 함께 일 배운 사람 중에는 그래서 떠난 사람도 많아요. 저야, 이것 하나 배웠으니까 죽을 때까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해 왔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내 손으로 문화재를 하나하나 세울 때마다 보람도 느꼈고요. 제게는 이 일이 곧 수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07년까지 모두 80억 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우리 나라 문화재 보수 정비 사상 최대의 역사(役事)가 될 이번 공사는 해체하는 데만 앞으로 2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부재 하나를 들어낼 때마다 표면에 붙은 이끼류를 제거하고 3차원 영상 복원 자료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실측하고 사진으로 찍어 놓는 작업을 함께 하다 보니 작업은 더딜 수밖에 없다. 지난 1년간만 해도 3,500컷의 사진자료와 100기가가 넘는 CD롬 자료를 정리했다.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 자칫 조그마한 훼손이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 보수하고 나서도 말썽 안 생기고, 적어도 몇 백 년은 까딱없이 서 있으려면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보수를 할 수 있도록 지켜볼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홍정수씨의 손길을 거친 문화재

1959년 서울 동묘 보수
1960년 서울 남대문 해체 복원
1964년 남한산성 서장대 보수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보수
1967년 아산 현충사 석축 공사
1968년 서울 홍제동 5층석탑 이전
1970년 도산서원 보수
1971년 월정사 8각9층석탑 해체 복원
1972년 불국사 보수
1975년 수원성곽 보수
1987년 경복궁 근정전 월대 공사
1996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보수
1998년 건원능 병풍석 해체 복원
1999년 구례 화엄사 동오층석탑 보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보수

권형진 기자
jinny@buddhapia.com
200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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