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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예술 복원 40년 외길 박순호 원광대 교수
“여 여혀~여허루 상사뒤~여 모손을 갈라 쥐고 거듬거듬 심어보세”

구성진 육자배기(판소리 계면조) 장단이 울려 퍼지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힘든 모내기 일도 술술 넘어간다.

지난 10월 16~18일 충주에서 열린 제4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순창 ‘금과 들소리’를 재현한 김영조(80) 씨를 비롯한 80여명의 전북 대표들은, ‘대통령상’이 확정되자 참가자 모두 지도교수인 박순호 교수(60, 민속학자, 원광대 국어교육)를 얼싸안았다.

“아이구, 저번에 내가 싫은 소리하고 연습 빠진 거 미안해.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교수님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 받았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107세 할머니의 노래 한 자락을 듣기 위해 며칠씩 집에 머물며 궂은 일을 했던 기억, 왼손 올리라고 하면 오른손 들고 흥에 겨워 혼자 덩실덩실 춤을 추던, 평균연령 70세의 ‘학생’들 때문에 속상했던 기억이 떠올라 박 교수의 코끝도 찡해진다.

1978년 위도 띠뱃놀이, 82년 남원 삼동굿놀이, 85년 익산 우도농악, 88년 완주 봉서사 영산작법을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수상작으로 일궈낸 박순호 교수. 그동안 숱한 상을 받았지만 이번 대회는 그에게 더욱 값지다. 연습 막바지 합숙훈련 때문에 할머니 기제사가 지나간 것도,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것도 몰랐지만 ‘전북의 농악을 재현해내겠다’던 평소의 소망을 이뤄낸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잊혀져 가는 우리 문화의 맥을 잇는데 조그마한 도움이 됐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박 교수는 “고장의 명예와 민속을 지키기 위해 농사일도 팽개치다시피 하고 농요 재현에 참여해준 농민들께 감사드린다”고 참가자들에게 공을 돌린다.

우리 민속예술 찾기 40년. 박 교수는 휴일이나 방학 때면 카메라에 녹음기, 캠코더까지 짊어지고 산골 마을로 답사를 떠난다. 나이 지긋한 분들의 소리 한 자락, 이야기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채록해 두기 위해서다.

이 마을 저 마을로 기약 없이 떠돌다 보면 ‘바로 이것’이다 싶은 농악이나 민요, 민속놀이를 발견하게 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과정에서 노랫말이 뒤바뀌거나 중간 구절이 빠져 있는 경우 온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아 노래를 다시 부르고 기억을 되살려 본다. ‘몸으로 익힌 것은 어떻게든 되살릴 수 있다’는 박 교수는 주민들과 수십 수백 차례의 회의를 통해 노랫말을 되살려내 공연 성격에 맞게 구성한다. 40분 정도로 구성된 공연물로 1주일에 2~3회씩 연습을 하고 대회가 가까워 오면 ‘합숙훈련’도 마다하지 않는다. 외부와의 연락마저 모두 끊고 연습에 매진하는 박 교수의 팀이 역대 최다 수상을 일구어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말하는 ‘우승 노하우’ 세 가지.

“농악이든 민속놀이든 첫째로는 원형이 70% 이상 보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허구’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두번째는 단일부락만으로 출연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오고, 또 그들이 보존해 나가야 하는 문화 아닙니까. 쉽게 ‘공연’을 하려고 다른 지방 사람이나 학생들을 동원한다면 의의가 반감되겠지요. 세번째로는 공연을 보는 사람들이 함께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연출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수상보다 더 큰 문제는 발굴된 문화의 보존. 대통령상을 받고도 전수자가 죽고 나면 명맥이 끊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 상 받고 나면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생계를 팽개치다시피 하며 공연을 준비한 노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몇 십 년 전과 다름없는 상금 800만원이 고작입니다. 공연 준비에 들어간 비용은 고사하고 전승ㆍ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비도 안 되거든요”

때문에 박 교수는 지역의 도움을 받아 보존회를 결성해 전수회관을 건립하고 후계자 양성에 힘쓰도록 한다. 그가 발굴한 위도 띠뱃놀이와 익산 우도농악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속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다. 농요보다 가요가, 민속놀이보다 컴퓨터 게임에 더 익숙해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민속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실제 다녀보면 ‘손으로 모심고 호미로 논매본 게 언제인지 모르는데 농요는 무슨…’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농요의 기능 자체가 상실된 것이죠. 농민들 사이에서도 잊혀져가는 농요를 찾아다니는 것이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민속놀이나 농요 속에는 우리네 역사가, 우리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되살려 전승시켜보자는 것이죠.”

어쩌면 소박해 보이고 한편으론 개인이 감당하기 벅차 보이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박 교수는 40여 년간 한뎃잠을 자고 마을의 궂을 일도 자청해 가며 우리 노래와 이야기를 모아왔다. “힘들 때면 의지가 되고 화가 날 때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고 자만심이 들면 고개 숙일 수 있게 해 준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박 교수의 불교사랑 또한 남다르다.

군산불교신도연합회 회장이었던 박 교수는 지난 1997년 재가불자들의 순수불교운동을 위해 불교대학 설립에 앞장섰고,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7년간 학장으로서 불자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공연을 앞둔 때면 근처의 만일사를 찾아 기도한다. 특히 봉서사 스님과 신도들이 한마음으로 재현해 낸 ‘완주 봉서사 영산작법(1988)’은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이다.

참선으로 하루를 열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요법회에 빠지지 않는 박 교수는 경연대회 참가 준비를 하는 틈틈이 자신이 모은 자료를 책으로 펴내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전국구비문학대계’, ‘전북예술축제’를 낸 것을 비롯해 2000여 권의 자료 중 102권을 영인본으로 펴냈다. 이 과정에서 판소리 열두마당 중 구전이 끊겼던 ‘무숙이타령’ 사설을 발견해 주목 받기도 했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랬다면 중간에 몇 번이고 그만뒀을 겁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민속예술을 발굴하고 지켜나가는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

글= 여수령 기자
snoopy@buddhapia.com
사진= 임민수 기자
yminsoo@buddhapia.com
200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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