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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암 안강역장
경주에서 포항을 오가는 동해남부선의 길목에 위치한 시골역. 풍요로우면서도 허허로운 가을 들판을 배경으로, 안강역에 노을이 물든다.

오후 6시경, 통일호 열차의 기적 소리가 정겹다. 풍채 좋은 중년의 역장이 깃발을 흔들며 열차를 맞이한다. 내리는 승객들과 일일이 함박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허리 굽은 한 할아버지는 역장과 몇 년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는 손을 흔들며 총총히 사라진다. 아침에 헤어졌다. 저녁에 만났는데도 더없이 반가운 사람들. 안강역에서의 만남과 이별은 늘 이렇다.

영화에서나 본듯한 이런 모습을 날마다 연출하는 주인공은 최해암(54) 안강역장.

시인, 카루나의모임 회장, ‘경주 YMCA 10대의 전화’상담실장, 인터넷 동호회 ‘안강 소식’(my.netian.com/~cham333)과‘삶 이야기’(club.sayclub.com/@salm3040)의 시숍 그리고 남편이자 네 자녀의 아버지. 성실한 직장인이자 건강한 생활인이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 ‘삶의 프로’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새마을호와 통일호 등 상하 30회의 여객열차가 머물렀다 떠나는, 하루 평균 기차를 타는 인원이 700여명에 불과한 작은 역. 최 역장은 이 곳에서 30여년간 늘 그래왔듯이 직장과 이웃,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산다.

어린이 자연학습장(닭, 토끼 사육)과 꽃밭, 문화사랑방 등을 갖춘 소공원화된 안강역. 역광장에 무료 주차 공간을 제공하고 스피커를 설치해 음악방송을 내보내는 곳, 화장실에 낙서판을 설치하고 손님에게는 아무 기록도 없이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역. 친절한 역무원들의 미소가 있는 안강역에서 ‘아름다운 프로’인 그를 만난다.

최 역장은 1973년 철도청에 입사했다. 부산역을 거쳐 모량역, 건천역, 포항 효자역, 울산 호계역 역장을 맡으면서 가는 곳마다 창의적인 경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97년 최고 친절인' 상 등 그동안 받은 표창과 봉사상 등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안강역의 전체 직원은 10명. 5명씩 번갈아 가며 야근을 한다. 철야근무를 하고 집에서 쉬는 날 자투리 시간을 아껴 자원봉사도 하고 포교도 한다. 부처님마을과 카루나의모임을 통해 소년소녀 가장과 결식아동,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것이 30여년간 해온 돈 쓰는 ‘부업’이다.

최 역장은 <카루나의모임> 회보, <안강소식>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교도 전한다. ‘Say Club’에서 인터넷 방송도 한다. 이런 매체를 통해 통해 삶, 불교, 효도 이야기를 나누고 철도 정보도 전한다.

이런 최 역장의 모습에 역무원들도 물이 들었다. 직원들은 매달 1만원씩을 모아 소년소녀 가장들의 살림을 돕는다. 역 이곳저곳에 놓아둔 돼지저금통에서 나오는 2∼3만원의 돈도 불우이웃돕기에 쓴다. 인근 지역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40여 가구의 소년소녀 가장들을 돌보고, 나머지 1500여 후원자들은 물심 양면으로 간접 지원을 한다.

또한 최 역장은 ‘소 젓 먹고 자라 송아지 짓만 하는’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기성세대의 책임을 절감한다. 가출한 청소년들을 역에서 발견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일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청소년에 대한 이런 관심은 그 자신 6.25 한국동란을 겪은 유복자로 어렵게 자랐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입고 입던 옷까지 벗어주시던 할머니 故 윤보련화 보살과 어머니 故 김보성화 보살의 말없는 가르침. 그것이 오늘의 최 역장을 만들었다. 한국보훈대상과 여러차례 효행상을 받은 효부(孝婦)였던 어머니는 항상 공심(公心)으로 살 것을 가르쳤다.

“우리 같이 어려운 사람들은 이웃이 없었으면 못 살았을 거다.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려운 이들을 보살펴야 한다.”

최 역장이 불교에 눈을 뜬 것은 중학교 때, 경주 분황사 불교학생회에서 ‘가장 높고 미묘하고 깊고 깊은 부처님 법, 백천만겁 지내도록 만나 뵙기 어려운 법(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이라는 경전을 여는 첫 구절을 듣고부터다.

이 때부터 그는 불자가 되었고 이제는 “지금 서 있는 곳이 극락이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 부처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자랑스런 불자다.

최 역장은 요즘 슬럼프에 빠져 있다. 어머니 김봉학 여사가 66세를 일기로 2년전 유명을 달리한 후 계속된 우울증이다. 그러나 최 역장은 전국에서 답지하는 후원자들의 정성을 생각할 때 주저앉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매달 100만원씩 결손가정 어린이를 위한 후원금을 보내오는 충주 임봉수 한의원장, 연말에 떡국을 몇 자루씩 보내오는 대구 옥황사 스님, 매달 2만원씩 입금해주는 기관사 등등 숨은 선행자들을 생각할 때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최 역장은 오늘도 고객을 위해 책장에 책을 꽂고, 수족관을 청소하며, 화분에 물을 뿌린다. 거창한 법문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에게서 ‘삶의 진실’을 본다. 안강역=(054)761-7788

경주=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20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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