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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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불광산사 개산종장 성운 스님
3월 28일 오전 인천 국제공항을 떠나 2시간여를 비행한 후 대만 중정공항에 도착,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도착한 불광산사는 대만 남쪽 태평양을 낀 까오슝(高雄)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침 해저물녘 바라보게 된 불광산사는 황금빛 노을과 어울린 거대한 아미타불이 기자를 반기는 듯 했다.

‘불광보조삼천계 법수장류오대주(佛光普照三千界 法水長流五大洲).’

삼천대천 세계에 불광(佛光)이 두루 비치고, 오대주(五大洲)에 법수(法水)가 흐르게 하자는 불광산의 창립이념이 새겨진 일주문(頭山門)과 불이문을 지나 대웅보전이 들어선 엄청난 넓이의 도량에 들어서자 수천명의 신혼 및 기혼 부부가 ‘부처님 손가락(佛指) 사리’ 앞에서 불광산사 성운(星雲)대사와 국제불광회 오백웅(吳伯雄) 회장의 참석아래 부부의 도를 지킬 것을 서약하는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높이 120척의 아미타불과 7만여기를 수용한 납골묘원인 만수원, 불광진료소, 불광연문물전람관 및 국제문물진열관, 8천명이 동시에 공양할 수 있는 공양간이 있는 운거루, 극락세계를 살아있는 듯이 그대로 재현한 정토동굴, 북방불교의 부처님을 모신 금불루와 남방불교의 부처님들을 모신 옥불루 등등. 불광산사의 엄청난 불사들은 전통 총림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철저하게 포교에 적합하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수천명이 동시에 숙박할 수 있는 6층 규모의 현대식 숙박시설인 신도회관에서의 하룻밤은 산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만큼 쾌적한 일류 호텔급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사찰들도 이런 신도회관을 갖추고 있다면 월드컵을 맞아 펼치는 템플스테이 사업도 쉽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예불을 올리고 아침공양을 한후 여래전 1층 객실에서 성운스님을 기다렸다. 조계사 상임법사 연담스님 등 5명의 스님 등 일행을 방갑게 맞은 성운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며, 좌담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국 스님들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스님들이 입고 있는 가사도 제가 젊을 때 입던 가사와 같아 더욱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과 인연이 깊습니다. 통도사와 한마음선원, 불교TV, 현대불교신문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앞으로도 한국불교와는 한가족처럼 지냈으면 합니다. 한국 불교TV에서는 4월부터 6개월간 나의 법문을 녹화방송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 테이프들은 30년전부터 녹화해 온 것들인데,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이젠 1만여개가 넘었습니다. 저는 이 테이프들을 보고 싶진 않군요(웃음).”

-불광산사에는 800여명의 비구니 스님과 200여명의 비구스님을 비롯해 많은 대중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사부대중이 모두 평등하게 생활한다고 들었습니다.

“남전불교는 비구니를 낮추어보는 경향이 있지만, 대만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이 모두 평등합니다. 불광산사의 전시관, 박물관 등에서는 여성 불자들이 책임을 맡고 있으며, 100여명의 유발 상좌들은 종립학교의 교장, 교직원 등으로 활동중입니다. 이에 맞춰 불광산은 복장, 의식, 신도조직 등 여러가지 제도를 정비했는데, 한국불교도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제도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니까요. 근본불교에서는 출, 재가의 구분이 적고 인간 제도(濟度)를 원칙으로 한 높은 차원의 불교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교육, 문화, 자선구제사업 등으로 정토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같은 ‘하화중생’을 위해서는 동시에 ‘상구보리’가 전제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100여년의 전통을 지닌 대만불교는 생활불교가 정착이 되었지만, 16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은 수행 위주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는 1950년 한국전쟁을 겪고난 후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전통에만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한국불교도 좌선만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염불도 하고 독경도 하고, 포교도 하고, 중생구제에도 나서야 합니다. 수행과 포교를 겸해야 불교가 발전합니다. 대만 불교는 시민들이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유아의 백일, 아이들의 유치원 입학에서부터 입학, 결혼, 장례 등 모든 의식이 불교와 인연을 맺도록 합니다. 어제도 2000명의 유치원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오늘도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을 만났고, 부부 언약식도 개최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과 인간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태허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불광산을 창립한 것으로 압니다. 태허대사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태허대사는 사심없이 중생을 위해 사신 분입니다. 새로운 생활불교를 제창하신 분이지요. 태허(太虛)대사는 설법으로 연을 맺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문자로 반야의 뜻을 해석하기도 하고, 경을 강의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어 중국불교가 기사회생하는데 청량제의 역할을 했습니다. 포교 방식은 시대에 맞게 상대방의 근기에 맞게 해야 하며, 불법(佛法)과 인간생활은 둘이 아니고 조화를 이뤄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 태허대사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위대한 스승이 있어야 좋은 제자들이 많습니다. 아울러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해야 불교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큰스님께서는 35년만에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불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불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어느 시기였습니다.

“불사중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40년전 맨 몸으로 대륙으로부터 대만에 와서 그동안 서른개 이상의 절을 짓고, 양로원 고아원 학교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외부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으니 스님! 어떻게 해서 당신은 이렇게 수완이 좋습니까?’ 하고요. 사실상 제가 무슨 대단한 수완이 있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가 <유마경>에 나오는 불청지우(不請之友: 고통받는 중생을 보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돕는 불보살과 같은 벗이 되라)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광산은 도량전체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연상하게 될 정도로 신심이 절로 나는 공간입니다. 지상에서 정토를 구현하려는 큰스님의 원력은 오랜 수행에서 우러난 법력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주로 어떤 수행을 했으며 어떤 견처를 얻으셨는지요.

“저는 좌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간경도 했습니다. (웃으면서) 하지만 제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금강경>에 ‘불법이라고 하는 것들은 불법이 아니다’ 또한 ‘모든 법이라 하는 것 모두가 불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두가지의 말에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염불하고 절하고, 경 읽고, 좌선하고, 보시하고 지계를 지키는 모든 것은 불법입니다. 그러나 만약 염불하고 절하고, 경 읽고 좌선할 때 마음 속으로는 줄곧 헛된 생각과 탐진치를 일으킨다면 이는 불법적이기는 하지만 곧 불법이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지혜의 빛으로 미망을 깨뜨려 비추어 마음 속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내고, 본래 있는 '부처의 성능' 즉 불성을 드러냄으로써 마음을 잘 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한국의 조계종과 같은 임제종의 법맥(48世)을 잇고 있으면서도, 좌선수행 위주의 조계종과는 달리 생활불교를 주창하고 계십니다. 큰스님의 ‘인간불교’ 구현은 임제종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까?

“선종에서는 '평상심이 도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고 말합니다. 진정한 선의 기쁨은 바로 특이한 것이 없는 평범한 일상생활, 즉 옷 입고 밥 먹는 가운데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호기심으로 이해한다면 도와는 상반되어 더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평상심이 도'라는 말은 한시라도 도에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밥 먹고 잠자는 것, 심지어 대소변 보는 것까지도 수행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참선은 몸만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의 비밀들을 철저하게 알아서 스스로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보배들을 잘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기억나는 수행담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12세에 출가하여, 15세에 계를 받았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시절엔 법당 안에서 눈 한번 돌려도 가차없이 스승님의 손이 날아왔습니다.
'여기 네 물건이 어디 있다고 보느냐?'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저는 몇 달간 눈을 뜨고 보지 않는 연습을 해 지금까지도 계단을 오르거나 길을 걸을 때 육안으로 보지 않고 심안(心眼)으로 감지하여 오르거나 걷습니다.

또 때때로 제가 철이 없어 법당 안에서 놀거나 떠들기라도 하면 선생님께서 철썩 뺨을 때리시며 '이 곳이 네가 떠들 곳이냐?'하며 나무라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전 일년 또는 몇 개월간 말하지 않는 연습을 했는데, 이를 묵언(默言)이라고 합니다.
간장이나 고추장, 된장, 김치를 담글 때 항아리에 담가 얼마동안 밀봉해 두면 맛이 더 순수하고 좋아지듯 제가 지금 말을 잘 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과거에 묵언과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 연습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킨 결과입니다.

총림에서 공부할 당시 우리가 받은 교육은 매 맞고 욕 목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은 함부로 보면 안되고 입은 함부로 말하면 안되고.....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수시로 야단맞고 또 매를 맞았습니다. 한 사람의 완성을 가속시키고 불법의 큰 길을 찾고 또 깨달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 어느때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때리고 욕하는 것은 모두 불법으로 변합니다. 소위 말하는 몽둥이와 할(喝) 아래서의 선오(禪悟)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중국과 한국은 모두 민족이 분단된 채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원인과 해결책은 없는지요.

“한국과 중국이 통일이 안되는 것은 아집 때문입니다. 이 무의미한 아집만 버린다면 통일이 가능하겠지요.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이든 아상(我相)을 버려야만 동체화합이 이뤄질 수 잇습니다. 불경에 이르기를 "불도를 이루지 못했거든 먼저 사람들과 연을 맺으라"고 했습니다. 연을 맺는다는 것은 남과 원만하게 지내며 우호적으로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통일도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한국의 불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

“불법을 배우고 공덕을 짓는 일이 반드시 입산수도를 하거나 재산을 털어 베풀어야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칭찬의 말 한 마디나 착한 행위, 미소, 지식들 이 모두가 널리 선연을 맺게 하고 큰 공덕을 짓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매일의 생활 가운데 단 몇분이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비추어보는 시간이 없으면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의 업무 속에서 번뇌를 씻어 맑히고 자신을 조용히 거두어들이는 훈련이 없어서는 안되며, 지지능정(知止能定 : 멈출 줄을 알면 능히 定에 들 수 있다)하여 가슴 속의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샘물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불교는 선정(禪定) 중에 무상의 지혜가 난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 조차도 날마다 명상을 잊지 않으시고 깊은 선정에 드셨는데, 범부인 우리들이 고요한 마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면 부평초처럼 온종일 경게에 끄달려 이리저리 떠돌게 됩니다.”

1시간 30분 가량 성운스님을 친견한 시간은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었다. 잠시도 쉴 수 없을만큼 바쁜 일정 중에서도, 잔잔한 목소리로 유머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대만을 비롯한 전세계 300만 신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성운스님. 그런 고승의 모습이 가장 자애로운 할아버지와도 같다는 사실은, 수행 전통과 계율을 오롯이 지키면서도 생활불교의 전형을 제시하며 대승불교를 이끌고 있는 대만 불교의 친근함과 저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운스님은>
1922년 중국 강소성 강도(江都)에서 태어난 스님은 1934년 12세때 의흥(宜興) 대각사에서 지개(志開) 법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오철(悟徹), 법호는 금각(今覺), 필명은 마가(摩迦)이다.
1941년 서하산(棲霞山)에서 계를 받고, 서하율학원, 초산(焦山) 불산불학원에서 수학했다. 이후 백탑초등학교 교장, <노도월간(怒濤月刊)> 주간, 남경 화장사 주지를 역임했다. 1949년 대만으로 건너와 중리(中壢) 원광사에서 머물렀다. 1950년에는 <인생월간>을 편집하고, 1952년 의란 뇌음사에 염불회, 홍법단 등을 조직하고, 1957년 대북에 불교문화 복무처를 세워 불교서적 및 불교음반을 출판하면서 포교사업을 기초를 닦았다.

1967년 고웅현 대수향에 불광산을 세우고, 그 전후로 수산불교학원, 중국불교연구소, 불교문물진열관, 불광정사(양로원), 대자육유원(고아원), 불광출판사, 불교진료소 및 보문중고등학교 등의 포교 및 복지기구, 교육기관을 설립해 교육, 문화, 자선구제사업 등의 토대를 만들었다.

1991년 타이뻬이 국부기념관에서 불광협회를 창립, 승속이 합심해 삼천대천 세계에 불광(佛光)이 두루 비치고, 오대주(五大洲)에 법수(法水)가 흐르게 하자는 ‘인간불교 및 인간정토’ 건설을 발원했다. 대만내의 40여개 말사와 전세계 30개국 40여 지원에서 4개의 종합대학(남화대학, 불광대학, 미국 서래대학, 호주 남천대학)과 13개의 불교대학, 불교위성TV와 불교일간지(인간복보), 불광의료원, 22개의 도서관, 8개의 미술관 등 단일 사찰로는 세계 최대의 포교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성운스님은 ‘사람들에게 신심과, 기쁨(歡喜), 편리함(方便), 봉사(服務)를’이라는 원칙아래 인간세상에 정토를 구현하기 위해 오늘도 설법과 자선사업을 쉬지 않고 있다.

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200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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