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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기도를 통해 병 고치러 오는 모든 이들이 인연에 맞게 병을 낫고, 병고(病苦)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해 달라‘는 발원을 한다는 오덕수 원장(69, 경희대 외래교수).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소재한 '송암 오덕수 한의원'의 병원장인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에 기상해 자택 인근에 위치한 동작동 지장사를 오르는 일로 시작된다. 법당에서 예불문을 시작으로 천수경, 소예참문, 관세음보살 정근 등을 하다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오 원장은 관세음보살 정근이나 108배를 하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울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며 한다.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하지 않은 거나 진배없기에,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일념으로 기도한다.
관음정진은 길을 걸으면서도, 운전하면서도 한다. 오 원장은 이런 하루하루의 수행력으로 한의사의 업을 40여년간 닦아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딸 오귀남(35)씨와 사위 김승수(36)씨에게 강조해 온 말도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거 아나? 기도 열심히 해. 침 놓을 때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워. 그러면 집중이 잘돼 실수가 없어. 그 가피력으로 난치병 환자를 고칠 수도 있지. 처방을 낼 때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야.”
오 원장은 ‘한의사와 환자의 마음과 침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일념이 되지 못해 방심하게 되면, 침이 제대로 안 들어가고 굽는다. 심하면 환자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겐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침을 연착륙시켜라. 부드럽고 천천히 놓으라'고 강조한다.
오 원장이 이처럼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한의사가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현대의 고승이었던 탄허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7년간 마음공부했던 지중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 원장이 탄허스님을 친견한 것은 1952년 18세 때 삼척 영은사에서 였다. 이듬해 가을, 상원사에서 탄허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출가생활은 7년간 했으며, 탄허스님의 도움으로 61년 27세 때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부친으로부터 배운 한학과 탄허스님으로 배운 경학은 한의학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탄허스님으로부터 배운 관상학, 음양학, 주역선해 등은 물론 아버지로부터 틈틈이 배운 <방약합편> <동의보감> 역시 한의학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탄허스님이 장부는 '위생을 지키고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며, 영은사에서 일요일마다 <의학입문>과 <마의상서>를 특강해 준 것은 두고두고 큰 방편이 되었다.
64년 12월 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5년 봄에는 2년 넘게 정성을 다해 간호했던 아버지 마저 눈을 감았다. 65년 10월에 한의사 면허증을 받아, 삼척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한의원은 생각보다 잘 되었다. 환자들의 병이 잘 나아 영동지역에서는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런 명성에 자신감을 얻어, 85년 서울 반포동에 40여평의 한의원을 열었다. 환자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복잡해지자, 작년 8월에는 서초동에 8층 규모의 병원사옥을 마련, 한의원을 확장 이전했다. 직원도 70명으로 늘었고, 24시간 한방 스포츠센터도 문을 열 정도로 유명한 한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 뒤에는 남모를 치열한 탁마의 세월이 있었다. 한의사를 개업하고 처음에는 신통하게 낫던 병들이, 똑같은 증상에 똑같은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밤을 세워 고민하며 한의서를 섭렵했다. 성품과 체질에 따라 적합한 처방을 달리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남을 살리는 제대로된 의술을 베풀기 위해 허준 선생처럼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무료로 치료했지요. 마지막 실낱 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의서를 뒤지고, 새로운 처방을 연구했습니다."
오 원장은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들을 심혈을 쏟아 치료하자 점차 완치율이 높아졌다. 난치병 환자를 다루다 보니 의술이 눈에 띄게 좋아지다보니, 자연 명의로 소문이 났다. 새로운 병은 새로운 의술을 배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치료에 한계를 느꼈을 때 의사는 연구를 하게 되며, 사람이 많이 죽을 때 명의가 탄생한다’는 의학계의 역설적인 통설이 사실로 확인됐다. 마치 세계대전 이후에 외과의학이 급속히 발달한 것처럼.
그는 이런 과정을 겪고 난 이후에도 줄곧, 하루동안 환자들을 진료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의서와 씨름했다. 풀리지 않는 화두와 대결하는 선방 수좌처럼, ‘완쾌’라는 화두 타파의 일성이 나올 때까지 오늘도 쉼이 없다. 이런 치열한 정진이 일상화된 탓에 오 원장은 제자들에게 “생명을 걸고 연구해라. 잠 자지 마라. 책 놓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67년 만경풍(뇌막염)에 걸려 실명한 네 살바기 아기를 2개월만에 시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엄마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풍열독에 의한 실명을 처방하기 위해 한의서를 더욱 깊이 연구했다.
이를 계기로 안과전문으로 유명해져 망막출혈, 망막박린, 녹내장, 포도막염, 망막염, 홍채염 등 대부분의 안과질환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들에게 많은 유루증(눈물이 많이 나는)이나, 안구건조등 등은 침을 맞고 약을 먹으면 간단하게 치료된다고 한다.
안과 질환과 함께 그동안 고친 불치병은 간암, 간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최근에는 파킨슨병, 관절염, 디스크, 알레르기성B염, 축농증, 두드러기, 아토피성 질환 등 난치성 질환을 잘 치료하고 있다.
“어떤 때는 신통하게 잘 듣는 처방이 잘 안 들을 때가 있어요. 인연이 맞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치료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는 "한의학의 본질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생체(生體)에서 확인되는 경락, 그 경락을 그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같은 인간 의식과 감정의 통로’로 본다. 경락은 물질적 에너지의 흐름뿐만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불자로서의 그의 의학관은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선(禪)적 돈오(頓悟)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자신과 환자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심의(心醫)야 말로 최고의 의사라고 말한다. 심의는 어떤 병에 걸렸는가를 보기전에 먼저 어떤 마음의 고통과 체질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를 살핀다.
불교의 병인론(病因論)에 의하면 첫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 원소의 부조화, 둘째 귀신(鬼神)의 병, 셋째 업병(業病) 등을 꼽아 왔다. 땅(地)과 물(水)은 음(陰), 불(火)과 바람(風)은 양(陽)으로 크게 구분되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조화론은 한의학의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조화론과 다르지 않다는게 오 원장의 설명이다.
오 원장은 딸과 사위의 간청에 따라 99년 11월부터 소아과, 부인과, 잡병 등으로 분류해 임상기록에 대한 원고정리와 녹음기록에 들어갔다. 진단을 하고 화제(和劑)를 내는 작업은 10년을 공부해도 따라하기 힘들다.
초보 한의사는 <본초강목>과 <방제학> 등의 책을 뒤지며 화제를 내야 한다. 이런 소중한 자료를 통해 10년이 걸릴 노하우를 며칠만에 얻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한의학을 오래하면 얼굴만 보고도 병을 진단할 수 있지요. 의서에 ‘보기(望)만 하고 아는 것은 신(神)이요, 듣고(聞) 아는 것은 성인(聖人)이며, 묻고 아는 것은 공(功)이며, 진맥(切)을 하고 아는 것은 교(巧)’라고 했지요.”
오 원장은 요즘 새벽기도와 함께 경전 독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탄허스님으로부터 배운 <화엄경> <주역선해> <남화진경> <중용>은 물론 <신심명> <금강경> <원각경> 등이 애송하는 경전이다.
“지극한 도(至道)와 선(至善)은 선악을 초월하되, 잠시도 떠나지 않는 것이며, 망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삼가라’(愼獨)는 것은 정(定)과 같다”는 경전의 한 구절을 읊어주는 오 원장. 그에게 있어 한의사의 길은 필생의 소임이었지만, 마음은 항상 오대산 상원사의 적막한 선방에 가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생명을 걸고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되뇌이며, 그는 오늘도 그를 찾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30초라도 망념없이 한 생각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근기가 높은 사람이예요. 마음을 모을 때는 '관세음보살’을 간절하게 외우세요. 무엇을 하든 생명을 걸고 진력한다면 병도 나을 수 있고, 원하는 일도 성취할 수 있어요. 한의사가 되든, 과학자가 되든 수행자가 되든 정성스런 마음으로 한 우물을 파면 못해낼 일이 없습니다.”
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