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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의 입적을 소리 없는 슬픔으로 삭히면서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짐짓 의연함을 보이는 103세의 노(老)보살 김 광명화 보살님. 혜암 스님의 은사 인곡 스님을 모신 인연을 계기로 50년이 넘는 세월의 인연 속에 30년을 공양주로 시봉했던 김광명화 보살은 “이제 나도 본래의 자리로 가신 큰 스님의 빈 자리를 지키다가 갈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삶과 죽음을 이미 초탈해 버린 듯한 어조로 담담히 말한다.
“혜암 스님은 참으로 도인이셨지. 언젠가 원당암 달마선원에 기와를 올리는 날이었어. 그날따라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걱정을 했어. 기와를 다 올리기 전에 비가 오면 서까래가 쉬 썩어 건물이 이내 상하거든. 그런데 큰스님께서 ”용왕아 너 잠자느냐“고 크게 세 번을 외치셨어. 누굴 꾸지람 하는 듯 했지. 아, 그런데 바로 비가 그쳤어. 다 그친 게 아니라 큰절(해인사)에는 내리고 원당암 일대는 그친 거야. 100미터 거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그래서 우리는 큰 스님의 도력이 하늘을 움직인다는 걸 알았어.”
김 보살은 원래 마산 출신이지만 혜암 스님의 수행처를 따라 다니느라 ‘전국구’가 됐다. 쌍계사 칠불암, 문경 봉암사, 태백산, 오대산 등지의 수행처를 거쳐 30여 년 전부터 원당암에서 혜암 스님의 공양을 도맡았다. 원당암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는 절 살림이 가난하여 고시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해야 했다. 그때 혜암 스님은 하루 한번 드시는 식사임에도 그나마 누룽지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고 회고하는 김 보살은 “그때는 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구하느라 산을 헤매 다니며 나물 뜯기에 하루해가 짧았지”라며 어려웠던 시절을 돌아보는 듯 잠시 눈빛이 아련해 진다.
“공양이라야 특별한 것은 없었어. 큰스님은 하루에 한 끼만 드셨고 소식(小食)을 하셨기 때문에 반찬걱정을 하거나 끼니때가 돌아오는 걸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었거든. 무김치와 동치미를 워낙 좋아 하셨지.”
김 보살은 혜암 스님에 대해 너무나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일일이 입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든 게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다시 구차하게 발설하여 구업이 될까 조심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평소 친분 있던 사람들이 젖은 눈으로 노보살의 손을 잡으면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 대한 얘길 꺼내곤 했다.
“문경 봉암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였어. 나는 담석 때문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지경이 되었는데 큰스님께서 뜰 앞의 풀을 뽑으라고 하셨지. 하지만 나는 몸도 가누기 힘든데 어떻게 풀을 뽑느냐며 문 밖으로 겨우 나갔어. 그 때 갑자기 큰스님이 소리를 치셨어. ‘보살, 몇 푼어치나 아프요?’ 그 순간 나는 몸이 가뿐해 지면서 뭔가 머리를 스치는 것을 알았지. 그때부터 나는 ‘이 뭐꼬’ 화두를 받은 셈이야 그 뒤로 화두를 놓지 않고 스님을 모시며 나름대로 정진을 해 왔어. 큰스님께서 늘 ‘화두 놓치지 말라’고 독려를 하신 힘에 의해서 말이야...”무엇보다 김 보살은 “공부하다가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강조하신 그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한결 같았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혜암 스님의 주장자였다는 것.
“참으로 꽃을 좋아 하셨지. 병에 꽂힌 것이나 공양대에 올려진 꽃이 아니라 풀 속에 제멋대로 피어 있는 산꽃과 들꽃들을 좋아 하셨어. 그래서 원당암과 미소굴 주변에는 늘 꽃이 많았고 큰스님이 직접 꽃씨를 뿌리시곤 했어. 일체 중생이 다 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김광명화 보살은 혜암 스님을 모시고 전국을 다니는 와중에 지리산에서 직접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체험까지 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큰 도인을 따라 다니며 공부하고 시봉한 것도 적지 않은 영광”이라는 원당암의 ‘상보살’ 김 광명화 보살은 “나중에 또 기쁜 얼굴로 스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며 큰스님의 법구가 모셔진 해인사를 향해 조용히 합장했다.
해인사 = 김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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