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지적 이해의 차원이라면, ‘깨침’이란 그 앎이 송두리째 난파당하는 경험이다. 즉 깨달음이 업의 연장에 불과하다면, 깨침은 업이 깨지고 부서지는 일이기 때문에 불교의 연기적 삶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바로 깨침을 통해서 가능하다”
<깨침과 깨달음>(윤월철 옮김, 예문서원)은 박성배 교수가 1983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출판한 ‘Buddhist Faith and Sudden Enlightenment(박 교수는 이를 ‘불교인은 무엇을 믿는가-돈오 사상과 관련하여’로 풀이했다)’를 번역한 책이다.
20여 년 전에 출판된 이 책이 현대에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불교의 가장 근본 관심사인 믿음, 닦음, 깨침의 문제를 명쾌하게 풀이하고 있다.
“닦음과 깨침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지은이는 “현대 불교학에서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 믿음의 문제에 주목함으로써 불교학이 봉착하는 여러 가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신(敎信)보다는 ‘나는 부처이다’라는 조신(祖信)이 불교의 올바른 믿음이며,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 즉 ‘몰록 깨침’은 조신을 바탕으로 해야만 성립한다고 말한다.
조신이라고 일컫는 이 믿음을 관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보는 실존적인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박 교수가 추구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박성배 교수를 이야기 할 때 ‘돈오점수 돈오돈수’ 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이 <선문정로(禪門正路)>를 내놓음으로써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사실상 시작됐다. 성철 스님은 보조의 돈오점수가 선문에서 바른 길잡이 역학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후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과 재비판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박 교수는 각각의 입장이 지닌 근본 취지를 최대한 받아들여 당면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로 삼고자 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 주장의 근본이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박 교수는 돈점의 문제를 푸는 열쇠를 ‘체(體)와 용(用)의 논리’에서 찾았다. 이 논리를 보다 쉽고 분명하게 밝혀 주기 위해 ‘체’를 ‘몸’이라 하고 ‘용’을 ‘몸짓’이라는 말로 바꾸어 자신의 철학적 고찰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즉 생명 있는 몸이라면 반드시 몸짓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본래 하나임을 안다면 깨침의 세계가 무엇인지 좀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출판 당시 ‘(깨침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출판사의 심사위원들 모두 혼란스러워한다’는 이유로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한 글과 부처님의 사제법문을 ‘생멸의 논리’로 보면 안된다는 내용의 글이 삭제된 채 출판됐다. 그 후 20년은 그에게 빠져 버린 두 장을 살려내는 기간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는 그동안 그가 연구해 온 결과물인 지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의 사제법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에 대한 답을 실었다.
1부에서는 ‘불교에서 믿음의 자리’, ‘깨친 이들의 믿음과 못 깨친 이들의 믿음’ 등 ‘믿음’에 대해, 2부에서는 ‘믿음, 닦음, 깨침은 하나이다’, ‘간화선과 믿음의 역동성’을 비롯한 ‘닦음’을, 3부에서는 몰록 깨침과 점차 닦음, ‘화엄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깨침 등 깨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값 9천8백원.
여수령 기자
snoopy@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