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자연 그리고 사찰을 주로 시조에 담아온 백수 정완영(83) 씨가 의미심장한 시조집 <이승의 등불>(토방)을 내놓았다. 이 시조집은 마치 이승의 온갖 탐욕과 망상을 떨친 듯한 원로 시인의 향취가 행간마다 묻어난다. 특히 머리말을 대신한 서시가 그렇다.
"내가 죽어 저승엘 가면 이승이 고향 아닐까. 너랑 나눈 한잔 차 이야기 오소스. 추운 낙엽 가을 밤 잘 익은 등불이 모두 꿈길에 밟히겠네."
이처럼 정 시인은 시어를 통해 이승과 저승이 둘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지구도 하늘일거야. 우리마음 징검다리는 하늘나라 오작교이고, 냇물에 엎드린 돌팍은 가막까치 머리일거야…"(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중에서). "한 팔십 산후에야 제주도에 건너가서, 차 한 잔 받아 놓고 한 세월을 지켜봐라. 찻잔 속 파도에 밀리는 섬 하나가 떠 있을라…"(한 팔십 산 후에야 중에서).
한 경지에 이른 시인의 시는 소리로 화하여 꽃이 되고, 꽃이 그대로 세상이 되고, 그것이 온통 삶임을 깨닫는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는 속세인에게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뭇사람들에게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처럼 환하게 다가온다. 마치 확철대오한 오도송처럼.
평소 사람마다 등불 하나씩 달아 준다는 심정으로 향 사르고 정좌하고 지성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던 정 시인. 그가 말과 생각을 아껴 내놓은 이 시조집은 시보다는 화두로 읽힌다. 값 7천원.
김중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