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가 즉 득도다. 훗날 돌아보니 속가로부터 가출은 이미 불가로의 출가였다. 백금남의 장편 ‘손가락 열두마디’(1,2권·자유문학사)를 독자들께 권하는 것은, 황사의 뒤끝처럼 뿌옇기만 한 요즘 세상에서 눈 앞을 열고 우리 가슴을 가만 들여다 보는 파독의 시간을 가지시라는 뜻에서다.
이 소설은 ‘나’로 묘사되는 불제자의 수행기다. 주인공쪽에서 보면 교양적 성장소설일 것이고, 밖에서 안으로 보면 구도소설의 범주에도 넣을 수 있다. 시대 공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후반까지다. ‘나’는 14살에 출가, 29살 어느날 오른쪽 손가락 열두 마디를 연지연향하고, 타다 남은 조막손에서는 생신사리가 나오는 불교계 초유의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은 한바탕 꿈같은 수행의 삶을 마치고 갈 길이 얼마남지 않은 주인공이 열반송을 쓰려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나’의 집안은 41명의 한 가족 모두가 승려가 된 불가사의한 가정이다. 주인공의 아명은 '김사성’이었으나 그의 법명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또 작가는 소설 속에 제3의 소설가를 등장시켜 액자구성을 만들고 있다. 이 작중 소설가는 “불교계의 큰스님이요 무심도인 대종사”였다는 주인공의 자서전을 속계의 각도에서 쓰게 된다.
주인공은 거짓 뒤에 있다는 숨어 있다는 진실과 그 추상미 속에 빠져 허위적대는 수도승의 허위의식까지도 독자들 앞에 발가벗어 본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추상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 같은 사람을 믿고 따른다. 시주를 하고 극락행을 원한다. 나도 모르는 극락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1권, 131쪽)
충남 공주의 마곡사와 갑사 그리고 구체적인 지명들, 외가 친가의 집안 가계도와 세세한 인명 등을 낱낱이 밝혀 놓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실존 인물일까, 라고 의심을 품어보는 순간,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무소득이 되고 만다.
불교철학의 사료와 잠언들이 소설 곳곳에 산적해 있지만, 문장은 결코 오만스럽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주인공은 원효 태고보우 경허 만공 혜월 한암 만해 청담 효봉 금오 동산 탄허 성철 등 평생 크고 작은 스님들을 우러르며 삶의 해답을 구한다.
‘산다는 게 무엇이던가. …사슴은 덫에 걸려 울고, 나방은 스스로 빛 속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고, 물고기는 미끼에 끌려 낚싯바늘에 걸리는 것을…. 우리 인간 또한 제 죽을 줄 모르고 썩은 새끼줄에 매달린 꼴이니 언제 이 업식의 바다에서 헤어날 것인가.’(61쪽).
그 시절들은 주마등처럼 끝나고, 이제 열반송까지 마쳤다. 주인공은 눈을 감는다. 모든 인연은 유위의 세계를 끝내고 이제 무위의 세계로 돌아간다.(2권, 299쪽) 그리고, 이제야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 것 같은데….(300쪽)
2001.3.23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