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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주택 지하단칸방 독거 김용례 할머니
젊은이들로 부쩍 대는 서울 돈암동 번화가. 즐비하게 늘어선 옷가게 거리를 등지고 나 있는 뒷골목. 고만고만한 연립주택이 어깨를 마주한다. 그 틈 사이에 자리 잡은 지하단칸방, 일찌감치 쾌청한 가을하늘과는 비껴서 있었다.

‘서울살이’ 60년. 흔한 말로 산전수전 다 겪고, 3년 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은 13살 때 올라왔다. 삼선교 큰 언니네 집에서 얹혀살다 6.25전쟁 통에 잠시 고향 조치원에 내려갔었다. 그리곤 23살, 집안의 중매로 낯선 사람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이혼했다.

김용례(72) 할머니. 여태껏 맘 편하게 하늘을 못 처다 본다고 한다. 갓 돌 지난 아들을 빼앗기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어미의 자책감’은 평생 풀지 못할 응어리가 되었다.

“대학원을 다녔던 남편은 독선적이었어, 올케도 마찬가지였고. 집안에서는 이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갈라서기로 했지. 하지만, 남편이 아들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저항도 못하고 내주고 말았어.”

김 할머니의 전부였던 아들. 보고 싶은 마음에 아들이 다니던 청계초등학교를 매일같이 찾아갔었다. 먼발치에서라도 아들을 보고 와야만 단 하루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남편의 재혼, 그나마 아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어져 버렸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생활, 이제는 살길이 막막해 졌다. 미용 일부터 보험회사까지 안 해도 본 것이 없이 다 했다. 오직 아들을 다시 보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살았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건 그 아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야. 그리움에 사무쳐 평생을 살아왔거든, 한스러울 뿐이야…, 참회하고 살았어,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 아들 놈 생각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

1997년 IMF. 김 할머니의 인생을 한 번 더 헤집어 놓았다. 그럭저럭 운영하던 김 할머니의 아동복공장이 하청업체의 연쇄부도로 문을 닫게 되자, 가재도구며 모든 재산이 압류돼 길거리에 나앉기도 했다. 그 때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는 김 할머니에게 급성당뇨병과 가난만을 안겨다 주었다. 급기야 2년 전에는 합병증으로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와 큰 수술까지 받았던 데다가 요즘은 왼쪽 눈까지 시력이 현저히 떨어져,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보증금 200백만 원에 사글세 8만 원짜리 지하방에서 버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끝내 울음을 터트린 김 할머니. 어머니 영정 사진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카네이션이 달려 있다. 올 5월 어버이날 인근 복지관 재가복지사에게 받았던 꽃이었다. 정작 아들에게 받고 싶었던 그 꽃을 김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들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할 때마다 큰 기둥이 되어줬던 어머니, 92년 아흔 한 살에 세상을 떠나면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어머니였다.

이제는 하얗게 백발이 된 두 모녀.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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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 기자
in-gan@buddhapia.com
200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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