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음성이라는 지명을 생각할 때마다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지명에 볕 양(陽)자를 집어넣는 것이 일반인데 어째서 유독 음성(陰城)만은 어두운 느낌을 주는 `음'자를 지명에 쓰고 있는 걸까.
이 곳 사람들은 음성의 옛 이름 `잉홀(仍忽)'이 `물골'을 의미하며 그래서 수원이 풍부하고 물이 넉넉하다고 여긴다.
`사계절 가뭄없이 넉넉한 물로 곡식이 잘되는 마을'이 곧 `음성'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내린 집중호우 때 시간당 72㎜의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큰 피해없이 넘어간 것을 보면 오히려 음성에는 물이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은 건천(乾川)이 많을 듯 싶은데 물이 많다고 여기는 것을 외지인들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해마다 반복되는 물난리에도 음성이 큰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은 고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덕일 것이다.
그래서 음성에서 생성된 계곡물이 흘러 흘러 남한강으로 빠져 수도권 시민들의 식수원이 되고 또 다른 줄기가 금강의 상수원도 되고 하는데 음성 사람들은 그걸 두고 물이 풍부하다고 한 걸까.
남한강 수원(水源) 가운데 하나가 소백산맥의 한 줄기인 가섭산이고 그 가섭산은 음성을 병풍처럼 두른채 넉넉하고 든든하게 음성을 지키고 있다.
미타사는 이 가섭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음성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문화 유적 측면에서 미타사는 음성을 대표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1964년 새로 지어진 절인 데다 이렇다 하고 내세울 만한 문화재들도 별반 없다.
극락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이 배치된 절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다만 2000년 개금불사한 높이 41m(108척)의 동양 최대 규모라는 절 입구의 지장보살입상이 이 절의 명물이다.
청주에서 충주방면으로 36번 국도를 달리다 음성읍내를 지나 소이면 비산리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가섭산으로 진입하다보면 명부전의 본존으로 지옥문전에서 눈물을 흘리며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 어마어마한 지장보살을 마주하게 된다.
두께 2m의 시멘트로 만들고 금이 섞인 금속으로 도장했다는 이 지장보살은 17억원의 조성비를 들여 2년간의 공사끝에 건립됐는데 무게가 3000t에 이를 만큼 웅장해 앞에 서면 절로 경건해진다.
문화재라는 것이 별수없이 한 시대를 살아온 양식이고 생활상의 흔적이라고 한다면 이 지장보살 역시 세월의 더께를 더한뒤 우리 후손과 만날 때는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보물'이 되겠다 싶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찰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마애불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연꽃 잎이 3중으로 조각된 고려 말기의 숫막새 등 이 절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뤄 이 절 역시 고려시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폐사돼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65년 수덕사의 비구니 명안스님이 8칸의 목조와가를 세우면서 지금의 절 모습을 띠게 됐는데 당시 이 시대 최고의 고승으로 꼽히는 금오와 혜암스님은 이 곳을 일컬어 "수도자가 도를 깨칠만한 도량"이라고 평했다 한다.
미타사라는 절 이름은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신봉의 대상으로 삼는 불교의 대표적 정토신앙인 아미타불 신앙에서 따온 듯 싶다.
처지나 신분과 관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정진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미타신앙은 신라의 원효에 의해 절정을 이뤘으며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평등사상과선인선과(善因善果) 사상을 담고 있다.
1976년 법당 앞 채소밭에서 출토된 직경 75㎝의 커다란 맷돌로 미뤄 전성기때 이 절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삼성각에 봉안된 석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출토당시 얼굴과 두 손이 없는 것을 복원했으며 전반적으로 세련된 맛이 없고 투박한 것이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교 양식을 보여준다.
투박한 느낌의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은 미타사 입구에 위치한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미타사 진입로 서쪽 암벽에 조각된 도 유형문화재 130호인 이 입상은 높이가 4m에 이르는데 머리와 어깨 주변은 깊게 새겨 입체감을 살렸으나 하반신은 계단식 옷주름을 간단한 선으로만 처리했다.
눈과 코, 입 등의 처리도 윤곽만 나타내는 형식화가 뚜렷해 삼국시대 화려한 불교 양식과는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머리를 사모를 쓴 형상으로 처리한 것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융성하기 시작한 유교문화가 불교 예술에도 녹아들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어서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비바람에 노출돼 풍화가 심했는데 이번에 음성군이 1억5천만원을 들여 비가림 지붕을 하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했다.
남한강 물줄기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 절집 뒤편부터 흘러내려 쫄쫄거리며 얕은 도랑을 이루어 흘러내리는 물이 유난히 시원스럽고 맑아 보인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가재가 살았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하늘을 가린채 우뚝솟아 길 좌우로 늘어선 수목들과 그 수목들을 거느리며 구불거리고 난 길을 거슬러 올라서야 산 중턱쯤에서 나타나는 이 사찰의 단아한 풍광은 절로 이 절집에서 하루를 묵고 잎새마다 이슬 머금는 아침을 맞이해보고 싶다는 생
각을 들게 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