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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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손주의 엄마’로 사는 박옥이 할머니
아침 7시 지용이(14)와 대용이(13), 막내 미정이(10)가 일어나 등교준비를 서두른다. 아침 끼니마저 거르고 학교에 갈 때가 많지만,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원망하기보다 며칠 전부터 당뇨가 심해져 온몸이 퉁퉁 부은 할아버지를 두고 나갈 생각에 발을 떼지 못한다.

당뇨와 고혈압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엄영섭(72) 씨, 좌골신경통으로 잠시도 앉아 있기 힘든 할머니 박옥이(67) 씨. 이들 노부부가 아이들의 할머니ㆍ할아버지가 아닌 ‘부모 노릇’을 시작하게 된 것은 10년 전 작은 아들이 행방불명된 후부터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지용이 엄마가 가출해버렸고, 작은 아들 또한 충격을 받아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다보니 졸지에 고아가 되다시피 한 지용이를 거둬 키우게 됐다. 게다가 6년 전 큰 아들마저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대용이와 미정이 남매 역시 이들 노부부가 맡게 됐다.

이들 노부부의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할아버지 엄 씨는 40년 전부터 결핵을 앓게 되면서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할머니 박 씨가 꾸리게 됐다. 3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45년 넘게 수발을 들다보니,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의 연속’이었다.

“큰 아들 놈하고 서울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어요. 큰 아들에게 참 많이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아들 녀석이 갑자기 쓰러져 뇌수술만 다섯 번 넘게 했을 때 눈앞이 캄캄했어요. 바깥양반과 시어머니까지 노환으로 꼼짝달싹 못하고 집에만 있을 땐, 막막했어요.”

요새 들어 박 할머니에게는 유일한 낙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받아온 상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하는데 공부를 곧잘 하는 아이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리다 잠든 아이들을 볼 때면, 측은한 마음에 가슴만 쓸어내리곤 한다.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간 지용의 교복도 인근 복지관에서 얻어다 입혔다.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죄책감까지 들었다.

이들 가족의 생계비는 할아버지 엄 씨 앞으로 나오는 생활보호대상 지원비 40만원이 전부. 전기세, 아파트 관리비 등 공과금 25만원을 치르고 나면, 다섯 식구는 15만원으로 한달을 살아야 한다. 더 이상 궁핍할 수 없는 생활이다.

“아이들만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어야 할텐데….”하며 할머니 박 씨가 말끝에 흐느끼고 만다. 보청기를 끼고 있어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할아버지 엄 씨가 표정만으로 다 이해했는지 웅크린 박 씨의 등을 토닥거려 준다.

주소 : 서울시 강북구 번3동 주공아파트 3단지 307동 712호
전화 02)982-7754, 계좌 국민은행 052-24-0165-780 예금주 엄영섭

김철우 기자
in-gan@buddhapia.com
200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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