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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기풍이 살아 있는 시를 즐겨 쓰고 4행시와 사찰탐방시집 <백사백경>을 내기도 했던 박희진 시인이 동지날(12월 22일) 낮 남양주 봉인사에 시비를 세웠다. 생전에 스스로 시비를 세웠다는 것이 선뜻 이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나면 숙연해진다. 우선 시비는 그간의 고정관념을 버린 쓰임새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비는 시인을 기리며 그의 대표작과 살다간 족적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박 시인의 시비는 그러한 기존 관념에 납골탑의 기능을 더했다.
느낌표를 현상화 한 시비의 비신에 위에서부터 구멍을 내어 납골함을 안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박시인이 타계하면 유골을 이 시비에 봉안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박시인의 시비는 시비이자 무덤인 셈이다.
이 시비는 박시인이 스스로 세운 것이 아니라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세웠고 박시인은 그저 그 일에 동참했을 뿐이다.(마치 남의 일을 하듯) 1970년대와 80년대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박시인의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은사님의 시비 겸 납골탑을 세운 것. 서울대 조소과 신형중교수가 시비의 형상을 구상했고 충남 온양에서 석재상을 하고 있는 공병대씨가 비 제작을 맡았다. 비신에 박시인의 시 두편을 앞뒤로 새겼는데 서예가 유형재씨의 글씨다. 시비가 설 자리를 제공한 제자는 봉인사 주지 적경스님이다. 이들은 모두 박시인의 제자들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묘비명’이란 4행시가 적혀 있다. 박시인이 오래전에 쓴 ‘어느 시인의 묘비명’이란 시다.
이 몸은 생전에도 보이지 않게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으니
나의 시행과 시행 사이
해와 달 별들이 보이면 그 뿐!
제막식은 아주 조촐했다. 시비를 세우는데 일조한 제자들과 박시인의 가까운 지인 서너명 외에는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인은 단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초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시인은 이유를 짧게 밝혔다.
“나 스스로 묘비에다가 ‘보이지 않게 살기를 원했다’고 적었는데 이 시비인들 누구에게 보이겠는가?”
박시인은 제막식에 나타난 기자에게 “절대 신문에 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기자는 “그 말씀을 기사에 꼭 넣겠다”고 해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
남양주=임연태기자
다음은 박시인과의 1994년 11월 인터뷰 내용(현대불교신문 제4호)이다.
북한산의 단풍이 붉어 시인의 창문도 진홍의 축제를 하고 있었다. 창을 열면 시인의 방은 어느새 북한산의 가을빛으로 가득하다.
백발이 듬성듬성 시인의 연륜을 얘기해 주는데 그의 삶은 아직 한여름의 푸른 숲과도 같았다. 북한산을 바라보는 능선에 지어진 아담한 빌라의 3층에 10년째 살고 있다는 박희진 시인 그의 문 앞에는 「好日堂」이란 당호가 붙어 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란 글귀를 줄여 붙인 이름이다.
당호가 얘기 하듯 박희진 시인의 삶은 언제나 즐겁다.
“내 평생의 화두는 시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시인답게 사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시에 미쳐 사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즐겁다. 즐거운 마음, 기쁜 삶이 아니고야 어떻게 시를 쓰는 사람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와 선은 어떻게 다릅니까.
▲다를 것이 없지요. 시를 쓰는 것은 언어에 몰입해 언어로서 인간의 정신을 순화시켜 다시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고 선수행을 하는 것은 생각에 몰입해 생각의 차원마저 넘어서는 것이지만 결국 인간에게 (혹은 자신에게) 기쁨, 더할나위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란 측면에서는 같은 것이니까요.
박시인은 시를 쓴다는 방법과 선을 한다는 방법은 같은 목적을 두고 끊임없이 자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일이기에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수행을 잘해서 보살이 되고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나 시를 잘써서 「시인보살」이 되고 「시인부처」가 되는 것은 같다”는 얘기다.
시인의 설명을 다시 구체적으로 이어 진다.
“시는 무엇으로 씁니까. 언어로 쓰는 것 아닙니까. 그럼 언어는 무엇입니까 사회학자들이야 사회적 계약이라고 말하겠지만 시인에 있어 언어는 인간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정신으로 인간의 정신을 순화시키는 작업이 시를 쓰는 일인 것입니다.”
시인의 창작작업은 인간의 정신을 맑고 깨끗한 경지로 이끌어 가는 구도행이란 설명이다. 박시인이 말하는 「시인보살」, 「시인부처」가 무엇인지 이해가 될 만한 설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남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시인 자신의 삶이다.
“시인의 삶은 시인다와야 합니다. 시인의 생활은 시가되야 합니다. 시인다운 삶은 사물의 실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그속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와 시인이 다를 것이 없다는 논리를 뒷받침 해 주는 것이겠군요.”
박시인의 삶은 언제나 시인답다. 그는 시인다운 시인이고자 「잠잘때는 방하착 깨어서는 초발심」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시어들의 축제로 그는 시를 써 내려간다. 1행시도 쓰고 4행시도 쓴다. 더러는 수백행의 장시도 써낸다. 시인의 표현대로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퍼내는 것이다.
“오후가 되면 육체의 신진대사를 위해 북한산의 숲으로 들어 갑니다. 숲속에서는 나 자신도 숲이 되고자 합니다. 노을지는 시간에 돌아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찍 잠을 잡니다. 다시 꿈틀대는 시어들의 몸부림으로 문득문득 눈을 뜨고 시를 쓰기도 합니다.”
박시인의 하루는 단조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언제나 시인다운 시인이고자 꿈틀대는 영혼은 단조롭지 못하다. 올 봄부터 박시인은 사찰기행에 몰두해 있다. “사찰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정결한 인간의 정신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대화가 있는 곳입니다,”박시인은 사찰 기행에서 돌아오면 그 사찰을 시로 노래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1행시는 직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박시인이 4행시로 쓴 1행시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다. “직관적 상상력이란 선수행을 통한 사물의 실체를 바로보는 눈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를 쓰는 작업 자체가 선수행의 과정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박시인의 눈은 어제나 사물의 이면과 이면마저 넘어 선 곳에 있는 진리를 파악 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것은 바로 박시인을 시인이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생활과 시작업의 과정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그의 독특한 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눈으로 그는 연꽃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순백의 연꽃은 순백의 극락, 진홍의 연꽃은 진홍의 극락」이라고.
이쯤되면 시인이 보는 연꽃의 세계가 왜 아름다운 극락인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1955년에 등단, 40년간 시를 써오며 14권의 시집을 낸 박시인의 서가에는 또 4권의 시집이 준비되고 있다. 사찰을 다니며 쓴시와 환경파괴를 염려하는 시 그리고 시와 선의 경지를 합일시킨 ‘마음의 시’들이다. 그중 1행시 한귀절이 기자의 눈을 번쩍 뜨게 한다.
「폭포를 오래보고 있노라면 폭포 떨어지는 굉음이 안들린다.」
임연태 기자
ytlim@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