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와 미국 스토니 브룩 뉴욕주립대가 지난 1997년부터 공동 추진해 온 ‘영어판 원효 전서’(Complete Works of Wonhyo·전5권) 번역 작업이 모두 끝나 마지막 수정을 거쳐 내년에 출간된다. 원효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의 어떤 문헌을 영역하는 것보다 까다로운 작업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한국 문화를 세계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보편화할 수 있느냐, 성패를 가늠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미국 스토니 브룩 뉴욕주립대 교수로 번역 작업의 실무를 총괄했던 조성택(趙性澤) 고려대 교수(철학과)의 기고를 통해 원효 저술 영역의 의미와 어려움을 짚어본다. (편집자)
원효 저술 영역(英譯) 작업이 이제 출판을 위한 최종 점검 단계에 와 있다. 서기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원효의 저술을 영역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효 저술의 영역은 고전(古典) 번역의 일반적 어려움 이외에도 많은 다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원효 저술 영역 작업의 고유한 어려움 중 한 가지는 원효 저술의 장르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현존하는 20여 종의 원효 저술은 대부분 논(論)·소(疏)·종요(宗要)들로 불교 문헌의 장르적 구분에 따르면 주석서(註釋書)에 속하는 것들이다. 불교 경전의 주석은 본질적으로 해당 경전에 대한 주석자의 자기 이해에 따른 독특한 해석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효의 저술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원효 경전 이해의 해석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의 번역자들은 우선 원효가 주석하고 있는 경전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뿐 아니라, 원효의 독특한 경전 이해 방식을 파악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동일한 경전에 대해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의 주석서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한 것이다.
두번째 어려움은 한문 특유의 압축적 표현을 영어로 표현하는 어려움이다. 압축적 표현은 때로 다의적(多義的)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 뜻만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 번역자로서는 난처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역주로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한다.
세번째는 한문 특유의 다의적 해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해석만이 ‘옳은 번역’일 경우에 부딪치는 어려움이다. 이럴 때 번역자의 선택은 옳으냐 그르냐의 선택이 되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예를 들면 필자가 번역한 ‘열반경(涅槃經) 종요(宗要)’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원부열반지위도야(原夫涅槃之爲道也) 무도이무비도(無道而無非道).”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도(無道)’와 ‘무비도(無非道)’를 연결하는 ‘이(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구문으로만 볼 때 이(而)는 순접으로도, 역접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참고로 현재 출판되어 있는 한글 번역을 보면 이영무(李英茂) 씨는 “원래 열반의 도라고 하는 것은 도라 할 것이 따로 없다. 그래서 도 아닌 것이 없으며...”라고 번역하고 있고, 또 다른 한글 번역자인 황산덕(黃山德) 씨는 “…도가 없으면서 도 아닌 것이 없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단순한 접속사의 차이가 아니라 ‘열반의 도’의 철학적 개념을 전혀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열반경 종요 전체를 일관하는 원효의 해석학적 전략을 살펴보면 원효는 열반과 불성(佛性)에 관해 무도(無道)와 무비도(無非道)의 양 측면을 다 긍정하는 한편, 이 양 극단을 중도(中道)로서 회통하려는 입장에 있다. 그래서 나는 열반경 종요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에 나타나 있는 원효의 사상을 검토한 끝에 ‘...there is no path and yet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the path.’ 라고 번역하였다. 물론 100% 만족할 수 있는 번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효의 원래 생각을 가장 가깝게 드러낸 표현이라 생각한다.
원효의 저술을 영역하는 것은 단지 원효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이 아니었다.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를 세계에 알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의상대사와 함께 당으로 가던 원효가 한 밤 중, 해골 바가지의 물을 먹고 난 뒤 자신의 ‘진로’를 바꾸었던 과정을 내내 생각나게 했다.
(趙性澤·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