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기치를 올린 일본은, 교토(京都)대 인문과학연구소 다카기 쇼지(高木博志) 교수에 따르면, 서유럽국가들사이에서도 '1등국'으로 대접받기 위해 대대적인 국광(國光), 즉 일본적 전통 창출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888년에서 1897년에 걸친 문화재 조사로 행동으로 옮겨지고 이를 발판으로 마침내 '일본 미술품'과 '일본 미술사'가 탄생하게 된다.
예컨대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봉안돼 있던 칠지도(七支刀) 또한 이 때 일본적 전통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재발견되며, 도다이지(東大寺)와 호류지(法隆寺)도 마침내 성소(聖所)라는 차원으로부터 문화재 혹은 미술품으로 일대 변환을 겪는다.
다카기 교수는 미술품으로 상징되는 문화재와 이를 다루는 미술사가 겉보기와는 달리 국가권력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탁월하게 조명했다.
일본 미술사 탄생과 관련해 재미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상징처럼 통하는 문화재들, 예컨대 석굴암이나 불국사 같은 유적과 유물들도 단순한 사찰 혹은 암자라는 종교시설 차원을 벗어나 일제시대에 비로소 문화재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일본 미술사학자들이 일본적 전통과 정체성 창출을 위해 부심했듯이 여기 "미술품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되찾"게 하고자 몸부림친 이가 있다.
최완수(崔完秀). 1942년 충남 예산 출생이니 올해 회갑이다. 그는 서울대 사학과 졸업 직후인 1965년 4월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가 1년만인 이듬해 3월 간송 전형필이 세운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의 학예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불교미술사학계에서 이른바 '간송학파'라는 일군의 학맥을 형성할 만큼 막강 파워를 지니고 있지만 대학교수 직함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서울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에 활발히 출강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렇다면 최완수가 생각하는 한국미술사는 그 요체가 무엇일까?
그가 지난 99년 7월부터 장장 30회에 걸쳐 월간 「신동아」에 기고한 연재물 중 8회분을 1차로 엮어 최근 단행본으로 나온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대원사)는 최완수가 지향한 한국미술사의 방향과 목적을 가늠하게 한다.
그는 말한다. "제 나라 역사를 모른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고 제 나라 역사를 기록해 놓은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면 이는 문맹이다... 지금 우리 민족 대부분은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가고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이 우리 역사를 교묘하게 왜곡시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외면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기억상실증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진단을 발판으로 최완수는 "지난 30년 동안 서울대와 연세대 등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사와 동양미술사 및 한국미술의 이해와 동양미술의 이해 등 강의를 통해 매학기 수백명을 대상으로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왔다. 미술품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했던 것이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언급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한국미술사를 통해 한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민족의 구성원임을 느끼게끔 하는 정체성과 전통을 창출하려 했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 주된 공격대상이 일제의 식민사관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을 통해 그가 왜 조선후기 이른바 진경산수화를 한국적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는지 그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여하튼 이번 단행본은 인도 불교미술의 발생에서 시작해 비단길과 중국 불교미술을 거쳐 삼국시대 이래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그래서 부제가 '法水東流 법수는 동쪽으로 흐르고'이다)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와 계통을 추적한다. 314쪽. 2만8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