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하나가 있다.
AD 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 동쪽나라 신라에서 갑자기 금문화가 극성기를 이룬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8세기대에 찬술한 일본서기가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의 나라”로 표현했을까. 이는 고구려·백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 왜 유독 신라에서만 황금문화가 번성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유리전문가이자 고미술사가인 일본인 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저서를 펴내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의 뿌리는 그리스·로마문화이며 따라서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었다”고 단언,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지난 30년간 이 책을 쓰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는 요시미즈는 “4~6세기 신라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유리와 그리스 로마 전통인 누금세공의 장신구류, 황금보검을 비롯한 금은제품, 그리스 로마신화의 성수(聖樹)신앙을 반영한 수목관 형식의 왕관 등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만의 독특한 유물들은 로마문화의 소산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신라왕관의 기본구조는 머리띠인 관테에 나뭇가지 같은 솟은 장식을 꽂은 형태”라면서 “이는 그리스풍의 꽃잎관 코로나와 페르시아식 머리띠 다이아뎀이 결합되어 성립한 서아시아 왕관계통이며 여기에 스키타이 문화와 한반도식의 독특한 문화가 결합되어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 미추왕릉 C지구 4호분에서 발견된 ‘미소짓는 상감옥’도 주목거리라는 것. 지름 1.8㎝에 불과한 옥에는 피부가 하얗고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4명이 상감돼 있다. 그는 이것이 로마문화권의 한 지역을 통치하던 왕과 그 가족일 가능성이 크고 그 왕이 자신의 가족 얼굴을 새겨 상감옥을 신라왕에게 선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극무늬와 금알갱이 장식이 있는 미추왕릉 계림로 14호분 출토 황금보검은 켈트문화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이한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 책에 대해 “한편의 완전한 소설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BC 3세기께 로마 장신구의 디자인·기법과 AD 4~6세기의 신라 금문화를 비교하는 등 시기적으로도 700~8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문화를 억지춘향격으로 끼워맞췄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왕과 왕비를 새겼다는 상감옥과 황금보검은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게 아니라 작은 무덤에서 나왔다”면서 “로마문화권의 왕이나 켈트왕국이 보낸 선물이 어떻게 소규모 무덤에서 출토됐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저자는 신라가 12간지를 썼던 기록이 있는데도 로마력을 썼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에 대한 기본인식도 없다”고 일축하고 “신라의 금문화는 북방 선비(鮮卑)족의 황금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검토도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이인숙 전 경기도박물관장은 “사실 신라에서 갑자기 꽃을 피운 금문화의 배경은 아무도 모른다”면서 “해외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신라 금귀고리의 기법은 그리스 기법과 거의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로마유리가 신라에서 출토되고 그것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왔다면 로마유리만 왔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요시미즈의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국학자의 주장이라해서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측은 일본 NHK 방송사가 지난 5월 경주에 촬영팀을 파견, 저자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유물과 유적들을 취재한 프로그램 가운데 15분 분량을 편집해 이미 지난 19일 위성방송을 통해 방영했다고 밝혔다.
또 9월말에는 50분짜리 풀버전으로 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역시 NHK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어서 신라왕국의 성격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