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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종교지도자들의 독립사상’재조명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종교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3·1운동을 종교계가 주도한 것을 비롯하여 주요 교단과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을 이끄는 데도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절을 앞두고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20세기 초 개신교·불교·천도교·대종교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들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먼저 김호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중앙대 교수)은 기조 연설을 통해 “종교단체는 신앙을 매개로 현실의 안위와 내세의 희망을 갈구하지만 민족주의와 결부되면 애국애족의 무서운 세력으로 돌변하며 이는 한국 근대사에 두드러진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에 대해 발표하는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은 남강의 민족운동 방략을 실업구국·신앙구국·교육구국으로 요약하며, 그가 ‘실력양성운동’ 계열의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고 분류한다.

김씨는 또 남강의 민족운동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통설에 의문을 제시하며 “남강은 1907년 도산을 만나기 전 서우학회(西友學會)를 통해 민족운동을 시작했고, 1909년부터는 기독교 신앙의 틀 속에서 민족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주장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白龍城:1864~1941) 스님을 다룬 김광식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은 “백용성 스님은 식민지하에서 일본 불교의 침투로 대처식육(帶妻食肉), 계율붕괴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한국 불교의 상황을 전통 고수를 통해 돌파하려고 했으며, 이를 위해 선학원·참선결사회·대각교 운동·선농불교(禪農佛敎)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김씨는 백용성 불교사상의 특징을 근본 추구·자주성·민중 중시·경제적 자립성 강조 등으로 요약한다.

대종교 창시자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에 대한 논문에서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보통 국수주의로 규정되는 나철과 대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나철은 1909년 대종교 중광(重光)을 계기로 유교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 전래의 신교(神敎)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민족이나 국가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류적 이상을 중시하는 세계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이런 보편성의 실현을 가로막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가장 큰 쟁점은 천도교 3세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를 둘러싼 평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인 서울대 강사는 “1910년대 민족운동을 대표했던 손병희는 민족이나 자주보다는 근대화, 그것도 서구적 근대화를 최대 강령으로 추구하는 문명개화(文明開化) 노선에 충실하고, 시의(時宜)에 따라 교(敎)와 정(政)의 일치와 분리를 번복하는 전례를 남김으로써 천도교가 종교적 정체성 확립에 실패하고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는 단서를 제공했다”고 주장, 논란이 예상된다.
(041)560-0406

조선일보
200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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