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15년(528) 불교 공인 이후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지(興輪寺址.사적 15호)에 있었던 신라 사찰은 회랑 내곽만 넓이가 4천평에 달하는 초거찰이었다는 견해가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신창수 유적조사실장은 곧 발간될 동국대 경주사학회 기관지 <신라문화> 20집에 기고한 '흥륜사의 발굴성과 검토'라는 글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흥륜사 절터 규모에 대한 학계의 언급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의 흥륜사지는 흥륜사가 있던 곳으로 알려졌으나 '令妙寺'(영묘사) 혹은 靈妙寺'(영묘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또 다른 신라 사찰인 영묘사 터라는 견해가 제시되는 등 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 실장은 이 논문에서 현재의 흥륜사 사적지가 흥륜사인지 영묘사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대신 1972년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개설공사 때 절터 서북쪽 서측 회랑지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확인한 것을 시발로 1981년까지 이 일대에 산발적으로 서너 차례 진행됐던 발굴성과를 토대로 절터의 구조와 축조시기 및 규모 확인에 주력했다.
그 결과 이곳에 자리했던 사찰은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금당과 강당, 중문(中門)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식(一塔式) 가람으로 추정됐다.
이 사찰은 출토유물로 볼 때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 병립하던 삼국시대에 초축됐으며 그 이후 신라 통일기에 대대적인 증축이 있었다고 신 실장은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지하 아래층 유적과 위층 유적 사이에 두께 1m 가량 되는 두터운 토사층이 확인되고 있음을 들었다.
절터 규모에 대해서는 사찰 전체 구역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회랑 내곽, 즉 중문.탑.금당.강당을 합친 구역이 96 x 132m로 3천700여평에 이르고 있으며 전체 사찰 면적은 이보다 훨씬 넓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신 실장은 "이러한 회랑 내곽 규모는 이 사찰의 초창기인 삼국시대나 이후 대대적인 중창이 있은 통일신라기나 변함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백제 무왕이 건립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한 최맹식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삼국시대 사찰로 회랑 내곽만 봤을 때 4천평은 황룡사(8천800평)와 미륵사(7천700평)에 이은 3번째 규모"라면서 "이런 거찰은 국가적 지원 없이는 건립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삼국시대 다른 주요 사찰의 회랑 내곽 규모를 보면 부여 정림사지가 1천300평이며 통일기에 김대성이라는 개인이 세운 경주 불국사는 1천500평인 것을 비롯, 대체로 1300-1700평 규모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