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끝동네’라 불리는 강원도 양양 미천골 자연휴양림 입구에 자리잡은 선림원지(강원도 기념물 53호)는 진전사지(강원도 기념물 52호)와 더불어 우리 나라 선종의 개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폐사지이다. 도의 선사의 전법제자인 염거화상이 주석했고, 염거화상의 제자이면서 가지산문을 개창한 보조선사 체증이 수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절터에는 초기 선종 미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삼층석탑(보물 444호)과 부도(보물 447호), 석등(보물 445호), 홍각선사비 귀부 및 이수(보물 446호) 등이 전한다. 또 1985년 동국대 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는 신라시대 당시의 가람배치가 그대로 남아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국미술사연구소(소장 문명대)가 7월 4일 개최한 ‘양양 선림원의 사상과 불교미술’ 학술대회는 바로 선림원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학술대회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불교사적으로 볼 때 선림원지는 화엄종 사찰이 선종 사찰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화엄종 승려들이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홍각선사 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을 발표한 권기종 교수(동국대)는 신라의 대표적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802년)를 세운 순응이 2년 뒤 선림원 범종 주조에 상화상(上尙和)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선림원이 화엄종 사찰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전사에서 도의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이 선림원(억성사)으로 옮겨와 체증에게 법을 전하면서 선종으로 변모했고, 870년 중엽 홍각선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했을 시기에는 완전히 선종화 되었을 것으로 봤다. 염거화상이나 체증은 모두 화엄학을 거쳐 선종에 입문했다.
권 교수는 “선림원(억성사)은 신라 하대에 있어 선법의 수용과 전개라는 면에서 큰 의미를 찾아야 한다”며 “염거와 체증, 홍각에 의해 초전선법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라는 점에서 선종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어 ‘선림원 본존불상 문제와 석비로자나불상의 연구’를 발표한 문명대 교수(동국대)는 머리가 없는 상태로 선림원지 아래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여 있는 석비로자나불상이 선림원지의 금당에 봉안되었던 본존불이라고 주장했다.
문 교수는 이 불상의 사각형 지대석 크기와 선림원 금당터의 사각형 불상대좌 기초석의 크기가 같고, 동화사 석비로자나불상, 축서사 석비로자나불상 등 860년대 비로자나불상과 양식과 일치해 홍각선사가 절을 중창했던 870년대와도 연대가 일치한다는 근거를 들었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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