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신계사 터에 대한 현장 조사 보고서인 <금강산 신계사지 지표조사보고서>가 나왔다.
이번 조사 보고서는 해방 후 북한지역 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학술 보고서란 점에서 향후 북한지역 불교 문화재 조사 연구의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정련)와 문화유산발굴조사단(단장 정각)이 지난 해 11월 2일부터 열흘간 신계사 터 일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는 조사 성과 이전에 그 자체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해방 후 최초로 북한 당국의 허가를 얻어 실시한 조사라는 점 외에도 장기적으로는 신계사 복원에의 첫 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신계사는 현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이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심으로 21채에 이르는 전각을 갖춘 대가람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불에 타 지금은 삼층석탑 1기와 만세루 돌기둥, 일부 건물의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현재 북한의 국보유적 95호로 지정돼 있다.
현장 조사 결과 신계사터에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유물인 삼층석탑이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라는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고려시대 조성설이 우세했던 이 탑에 대해 문명대 교수(동국대)는 기단부에 새겨진 비천상과 팔부중상의 조각 양식이 같은 강원도 지역의 9세기 석탑인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선림원지 삼층석탑 양식과 같은 계열의 것이라며 이 같이 결론지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당시 폭격으로 기단부가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어 붕괴 위험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를 보면, 현재 북한이 정비해 놓은 가람 배치에도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이미 1974년 <신계사터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냈으며 1998년에는 일제시대 자료를 토대로 중창 당시의 대웅전과 만세루 등의 설계도를 완성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재 터에는 건물터마다 전각 이름이 적힌 푯말을 설치돼 있는데, <유점사 본말사지>의 ‘신계사지’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기록에는 부속 건물인 최승전이 60여 칸에 이른다고 되어 있는 반면 현장에는 조그마한 요사채 규모의 건물터 앞에 최승전터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규모로 봐서는 1926년 최승전터 뒤에 4칸 규모로 신축했다는 창고일 가능성이 높다. 현 최승전터 동쪽의 넓은 소나무 군락에서 기와 조각과 건물의 초석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 소나무 군락이 원래의 최승전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번 보고서에는 <신계사지>에 기록된 연혁 부분 이외에도 일제시대 자료를 집대성해 신계사 연혁을 새로 정리해 실었다.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실어 앞으로 신계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쓰일 수 있도록 했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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