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말∼8세기 초 신라에 유학했던 일본인 승려가 필사해 간 것으로 알려진 원효 스님의 저술 <판비량론(判比量論)>이 신라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동아시아 각필 연구자인 고바야시 요시노리 일본 도쿠시마 대학 교수는 2일 <판비량론>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일본 오타니 대학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판비량론> 필사본에서 신라시대 언어와 한자 발음이 적혀 있는 각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고바야시 교수에 따르면, <판비량론>에서는 특히 한자 발음을 읽기 위한 ‘문장 부호’처럼 생긴 각필이 다수 발견됐는데, 이는 일본에서 발견되는 각필 문장 부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일 뿐 아니라 한자 발음 역시 한국어로 읽힌다. “일본인이 베낀 책이라면 신라식 각필까지 베낄 리가 없기 때문에 신라인이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또 각필에는 일본의 가타카나 문자와 비슷한 모양의 독음이 달려 있어, 한자를 읽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가타카나의 원형이 한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고바야시 교수는 덧붙였다.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돼 있는 <판비량론>은 원효 스님이 671년 고대 인도의 논리학인 인명(因明)의 형식을 빌어 유식(唯識)학을 설법한 저술로, 두루마리 형태로 일부 내용이 전한다. 일본 학계에선 가타카나 문자가 서기 800년쯤 한자의 일부를 줄여 만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보다 앞선 740년 일본 황후에게 바쳐진 <판비량론>에서 가타카나와 비슷한 조어 방식을 가진 신라인의 각필이 발견됐다는 것은 가타카나 한반도 유래설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원효 스님의 저술인 <대승기신론 소. 별기>, <금강삼매경론> 등을 번역한 은정희(서울교대) 교수는 “7∼8세기 경 원효 스님 저술만 50여 권 필사를 해 간 당시 상황을 볼 때 신라인이 베낀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신라인이 썼든 일본인이 썼든 일본에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불교 서지학자인 박상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실장은 “고바야시 교수는 일본 고문서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에서도 특 A급 학자로, 각필로 새겨져 한자 발음이나 번역 순서를 알려주는 훈점이 일본의 독자적 발명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 동안의 입장에서 급선회하여 재작년 우리 나라 고려 초조대장경 등에서 발견된 구결(한문에서 사용하는 우리말 토씨)이 일본 가나의 원류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만큼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며 “문화사적으로 한국 문화의 일본 전래설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것이면서 최고(最古)의 필사본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각필이란】각필은 상아나 대나무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젓가락 모양의 필기구로, 옛날 사람들은 한문 서적을 읽을 때 한자 옆에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기 위해 그 끝으로 눌러서 패게 해 문자, 부호, 그림을 표시했다. 눌린 흔적만 있을 뿐 색깔이 드러나지 않아 고문헌 연구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40여 년 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후 중국, 티베트, 한국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선 원문 한자 옆에 각필로 새겨져 한자 발음이나 번역 순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훈점(일명 오코노 점)이 일본의 독자적 발명이며 이것이 점차 가타카나 문자로 발전했다고 주장해 왔다.
권형진 기자
jinny@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