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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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고승영정 선암사 봉안
선종이 중심이 되는 한국 불교에 있어 고승 진영은 제자들이나 재가 신도들이 스승의 존재를 떠올리며 수행의 경계로 삼고 위안을 얻는 대상으로 모셔져 왔다. 또 진영을 조성해 역대 스승의 법통을 세움으로써 문중의 입지를 분명히 하고 정신적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여러 사찰의 조사전에는 종파의 시조나 사찰의 창건주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최근 선암사에서는 달마선사와 혜능, 임제, 양기, 청공 그리고 태고 스님의 영정을 봉안하는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태고 보우 스님의 임제선풍을 잇고 있는 선암사가 여섯 고승의 영정을 모심으로써 임제선의 맥을 짚어보고 자신들의 종맥을 알리기 위해 추진하는 일이다.

선암사는 작년 12월 종조(宗祖)의 사상과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태고 보우 스님의 영정을 조사당에 모신데 이어 오는 4월 7일에는 혜능, 임제 스님의 영정을 봉안하고 올해 안으로 달마, 양기, 청공 스님까지 조사당에 함께 모실 계획이다.

영정을 봉안하는 이번 불사에는 지허 스님과 불화가 김범수 씨가 앞장서고 있다. 김 씨가 선암사와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해 태고스님이 영정 작업을 맡으면서부터다. 이후 지허 스님이 여섯 분의 조사 진영을 모시려는 원을 세우면서 가장 먼저 일을 제안한 사람이 김 씨다.

현재 선암사에는 도선국사와 대각국사의 영정을 비롯한 20여 폭의 영정이 남아 있다. 하지만 법당에서 피우는 향 그을음과 오랜 세월로 인한 종이 자체의 산화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김 씨는 닥종이에 석채(石彩)를 사용해 영정을 조성하고 있다. 석채란 천연 재료에서 색을 추출한 후 이를 아교에 개어 물감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청색 계통에는 감청석이 원료가 되고 흰색은 대합이나 조개껍질이 주 원료가 된다.

석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닥종이에 황토를 10여 차례 칠해 색이 우러나도록 한다. 이는 종이가 직접 산소와 접촉해 색이 변하는 것을 막아준다. 석채 물감 역시 20여 차례 덧바르는 과정을 거쳐야 색이 곱게 우러나고 물감이 두텁게 올라도 떨어져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영정을 그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은 기본 자료를 찾는 일. 지허 스님은 일본과 중국에 전하는 조사들의 영정을 찾아내고 스님들의 게송과 어록, 가르침 등의 자료를 수집했다.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어떻게 표현해낼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김 씨 역시 조사들의 영정을 찾아내 비교하기도 하고, 고려시대 복식 연구와 고려 불화에 나타나는 문양 재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작업을 거쳐 한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는 보통 3~4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한 장의 그림에 스님들의 모습은 물론 가르침과 생애까지도 담아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더디지만 정확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허 스님과 김 씨의 생각이다. 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기본 형상과 얼굴을 10여 가지 형태로 그리면, 선암사 스님들을 비롯한 10여명의 강백들이 모여 여러 스케치 중 가장 스님의 가르침과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공통으로 느끼는 작품을 선택해야 비로소 채색작업에 들어간다.

김 씨는 “달마스님의 경우 대부분 선화 형태로만 그려져 왔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영정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사당에 모셔질 여섯 분 영정을 보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느끼고 또 발심하게 된다면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의욕을 내비쳤다.

태고종 종맥 알리는 기회로 삼겠다
영정 조성불사 이끄는 지허 스님

“현재 우리나라 불교는 법맥에 대한 인식이 흐려진 상태입니다. 혈맥이 끊어지면 피가 돌 수 없는 것과 같이 법맥을 잊은 불교는 그 방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영정 봉안 불사를 이끌고 있는 지허 스님은 이 같은 생각으로 지난해 종조인 태고보우국사의 영정을 모신데 이어 부처님에서 제자 가섭, 달마 혜능 임제 양기 청공 태고스님으로 이어지는 여섯 고승의 영정을 모시는 불사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번 영정 봉안을 계획하며 임제선의 맥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지허 스님은 “진영을 봄으로써 불법 생활 속에서 실천한 스님들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느끼고 배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모셔지지 않았던 스님들의 영정을 그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님들의 게송과 어록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각국에 흩어져 있는 영정 자료를 수집했다. 혹시나 스님들의 모습과 가르침이 잘못 표현될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번 불사가 완성된다면 임제선의 법맥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태고종의 종맥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조성 의의를 밝혔다.


전통 석채 기법 오늘에 재현
영정 조성하는 김범수 씨

“형사(形寫)는 쉽지만 사심(寫心)은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정을 그리면서 가장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부분이 그분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화가 김범수(50) 씨는 영정을 그리는 일이 단순한 모사(模寫)가 아니라 선사들의 가르침을 화폭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선암사의 영정 불사를 맡은 김 씨는 원광대학교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일본 경도예술대학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했다. 이때 석채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25년 동안 석채를 이용해 그림을 그려온 그는 이번에 모시는 영정들도 모두 석채로 그렸다. 오랫동안 석채를 다루어온 김 씨지만 “이제야 조금 손끝에서 석채의 느낌을 알 수 있다”며 “석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일은 기술이 아니라 수양의 길”이라고 말한다.

백양사의 각진국사 영정과 공림사의 탄성스님 영정을 그리기도 한 김 씨는 영정의 선을 하나 그을 때 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선과 색 하나하나에 연화장 세계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염원을 담으려는 것이다. 이렇듯 집중해서 하루 8시간 정도 작업해도 영정 한 폭을 완성하는 데는 보통 4~5개월이 걸린다. 때문에 김 씨는 올 한해는 달마, 양기, 청공 세 분 스님의 영정을 그리는데 온 힘을 다하고 싶다고 한다. 김 씨는 “작품마다 선사들의 가르침을 담으려는 제 기도가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여수령 기자
snoopy@buddhapia.com
200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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