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천도 이후의 백제 와당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금까지의 정설을 깨고, 북조의 영향도 함께 받았다는 논문이 나왔다.
와당은 목조 건물의 처마 끝에 쓰이는 막새기와로, 암·수키와의 한쪽 끝에 문양을 새긴 드림새를 접합하여 완성한다.
조원창(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씨는 최근 나온 <백제문화>(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30집에 발표한 논문 ‘웅진 천도 후 백제 와당의 중국 남북조 요소 검토’에서 “부여 지역에서 발견되는 백제 와당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꽃잎이 둥글거나 끝에 돌기가 달려 있는 원형돌기식 연화문이 대부분이지만 부여 용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은 그 양식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하고 “연꽃 끝이 뾰족한 이런 양식은 중국 북조 문화에 그 원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조 씨에 따르면 부여 용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의 특징은 우선 꽃잎의 끝이 뾰족한 판단 첨형 양식이라는 데 있다. 가운데 부분인 중방이 꽃잎 부분인 화판에 비해 약 1.5배 가량 크고, 꽃잎과 꽃잎 사이의 간판이 역삼각형이 아니라 짧은 마름모형이라는 점, 꽃잎과 외곽을 구분짓는 일종의 테두리인 원권대(圓圈帶)가 없다는 점도 독특하다.
조 씨는 “이러한 특징들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당시 유행했던 판단융기형 또는 원형돌기식 와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양이다”며 “중국 북위의 석굴사원 안에 표현된 연화문에서도 이와 똑같은 표현 양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북조의 영향을 받아 6세기 초 등장한 판단 첨형 양식은 6세기 후반부터 남조의 원형돌기식 연화문에 흡수돼 갔으며 서혈사터에서 출토된 와당에 이르면 북위 양식은 첨형(尖形)만 남게 된다고 조 씨는 덧붙였다.
권형진 기자
jinny@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