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절인 비조사(596년 창건, 법흥사라고도 함) 금당은 고구려 양식일까, 백제 양식일까?
‘비조사 금당=고구려 양식’이라는 학계의 통설을 뒤집은 논문이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조원창(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책임연구원) 씨는 최근 <백제연구> 33집에 기고한 논문 ‘백제 이층기단 축조술의 일본 비조사 전파’에서 “금당 조성에 쓰인 축조술인 ‘이층기단’의 외형에만 초점을 맞춰 그 기원을 고구려의 금강사터와 연결시켜 보는 것은 제고되어야 한다”며 “비조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건축가(造寺工, 조사공)들이 조성했으며 금당 역시 고구려 형식이 아닌 백제 형식”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건물에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주변보다 높이 다지는 기단을 2층으로 쌓는 방식인 이층기단은 삼국 중 5세기 말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고, 이 때문에 비조사 동쪽 금당의 이층기단 역시 고구려 식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층기단 축조술은 백제나 신라에도 전파됐고, 특히 백제는 고구려 식을 발전시킨 나름의 축조술을 갖게 됐는데, 비조사 금당의 이층기단에 쓰인 축조술은 바로 백제 양식이라는 것이 조 씨 주장의 요지다.
조 씨의 이러한 주장은 비조사 동쪽 금당의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의 한가운데에 또 다른 석렬이 한 줄 지나간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이층기단은 고구려 정릉사터와 금강사터, 백제의 정림사터와 부여 능산리 절터, 신라의 황룡사터 최종가람(584년 장육존상을 안치하기 위해 중건된 사찰)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사이에서 석렬이 확인된 곳은 비조사의 동쪽 금당터와 부여 능산리 절터의 금당터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 씨는 “부여 능산리 절터 금당터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사이에서도 길이 10cm 내외의 잔돌들이 열을 지으며 축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능산리 절터의 조사공(造寺工)이 비조사 동쪽 금당의 축조에 참여했거나 그 축조기술이 전파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조 씨에 따르면, 비조사 동쪽 금당의 이층기단이 고구려 식이 아니라 백제 식이라는 것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조사가 건립될 시점부터 동·서 금당이 완료될 때까지 고구려의 조사공이 일본에 파견되었거나 혹은 파견 요청을 받은 기록은 국내·외 어느 사서에서도 살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백제 조사공의 파견은 <일본서기> 등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백제 조사공들이 일본에 파견된 후 비조사가 창건되고 이층기단이 조성된 것은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필연적인 사실이다”고 조 씨는 말했다.
1탑 3금당식 가람구조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비조사의 발굴조사가 실시된 1957∼8년 당시만 해도 실질적인 삼국시대 절터 조사가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 1탑 3금당식 가람구조가 확인된 곳은 고구려 절뿐이었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은 비조사의 가람배치를 고구려와 연결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이후 별다른 후속연구 없이 통설로 굳어져 왔다.
조 씨는 “이층기단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전파되었고 이를 발전시킨 백제의 조사공들에 의해 일본에 전파됨으로써 비조사뿐 아니라 이후 법륭사나 산전사, 판전사, 고려사, 대봉사의 금당 조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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