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이나 고인돌에 새겨진 암각화와 빗살무늬 토기, 와당이나 석탑, 건축물에 새겨진 문양 속에서 우리는 판화의 연원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불교가 우리 문화의 큰 중심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불교 판화는 우리 전통판화의 뿌리가 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판화는 1007년(고려 목종 10년)에 총지사의 홍철대사가 간행한 보협인다라니경(寶?印陀羅尼經) 변상판화이다. 책머리에 부처님이 공양을 받기 위해 인도되는 장면이 판화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고려 시대에는 불경 제작시 변상판화들도 함께 제작되었다.
우리 판화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는 판화가 홍선웅씨가 11월 28일~12월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 ‘홍선웅의 판각기행’을 연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민족미술협의회에서 당시의 비민주적인 사회상을 표현하며 민중 판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홍씨가,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규장각 그리고 여러 서원에서 접한 경판과 목판본 문집을 통해 우리나라 목판화의 장점을 발견하고 전통 목판화에 담긴 자연과 생명을 찾아 나선지 7년여 만에 여는 것이다.
홍씨는 “고려와 조선시대 목판의 투박하고 힘찬 각선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무언의 질서를 보았으며, 거친듯 하지만 마구리까지 하며 정성들여 다듬어 놓은 목판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대지의 커다란 품과 본(本)이 느껴졌다”면서 “찍어낸 판화만이 아니라 판(板)과 각(刻)과 형(形) 모두를 중요시하며 발전시켜온 우리 선대 각수들의 폭넓은 판각문화 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프레스기로 인쇄한 듯 세밀하게 20~30도씩 찍어내는 현대 판화보다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고졸한 멋을 풍기는 고(古) 판화나 먹 판화에 더 애착을 느낀 황씨가 본격적으로 전통 먹 판화 작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 경기도 강화 보구곶리에 터를 잡고, 칼 쓰는 법을 다시 배우고, 먹 판화 작업에 매진했다.
홍씨는 망치로 조각칼을 두드리며 깊고 얕게 파나가는 투각법(打刻法)과 칼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인각(引刻)의 판각기법 통해 힘차고 옹골찬 각의 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또 먹 선묘의 단백한 맛을 살리기 위해 조선 닥종이나 천연염색을 한 무명천을 바탕으로 선택하고, 먹을 갈 때 한약재인 천궁 달인 물을 사용해 번지거나 먹의 농담이 고르게 찍히지 않는 약점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개발 보완했다.
이번 전시에는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법을 구하는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형상화한 연작 ‘선재동자 구도기’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화법을 판화로 끌어온 ‘하동 쌍계사’, ‘해남 미황사’, ‘해인사 백련암’ 등 진경판화 등 40여점이 선보인다.
홍씨는 이번 전시와 더불어 판화를 감상하며 우리 판각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살펴볼 수 있는 <홍선웅의 판각기행>(미술문화)을 펴냈다. 전국 사찰과 유적지의 목판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판각 문화에 대한 사유를 글과 작품으로 담아 낸 판각기행집이다.
이은자 기자
ejlee@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