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찬술한 곳은 과연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군위 인각사가 맞을까?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운문사 주석시절인 1277년에서 1282년 사이에 찬술한 것이라는, 기존 통설을 뒤엎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불교어문학회(회장 오출세) 주최로 11월 10일 경주 기림사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일연스님의 생애와 <삼국유사>’ 주제발표를 한 조춘호 교수(경산대)는 이 같이 주장하며 일연스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일연스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고려국 화산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하 보각국존 비명병서>와 <고려 인각사 보각국사 비음기>가 전부. 하지만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에 대한 행적은 비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조 교수가 <삼국유사> 편찬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으로 주목한 것은 <삼국유사> 중 스님의 제자 무극 혼구스님이 기술한 <전후소장사리>조다. 몽고 침입으로 1235년 강화도로 천도 당시 불아(佛牙)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된 과정을 밝힌 이 글에는 “각유스님이 이러한 사정을 기록하게 하여 적게 되었으며 1284년에 국정사 금탑에 이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 교수는 “1284년은 인각사를 하안소로 정해 옮겨 간 해이므로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인각사에 오기 전 운문사 주석시절인 1277년부터 1284년 사이에 찬술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주장했다. 또 인각사 주석 기간(1284∼1289년) 동안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연 것으로 볼 때도 인각사에서는 <삼국유사>를 찬술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밖에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해에 조정에서 인각사를 일연스님의 하안소로 삼아 중창하게 된다”며 “일연스님이 노모를 위해 국사 자리를 버리고 하산영친(下山寧親)한 곳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각사가 아니고 고향인 경산이나 경산 인근인 운문사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입적하셨고, 부도와 신도비가 남아 있는 도량으로 의미 매김을 새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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