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부여 능산리 절터(434호)의 발굴 보고서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나왔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 성과를 담은 보고서 <능사(陵寺)>는 '능을 지키는 절'이란 제목에서부터 일부 이견이 제기됐던 이 유적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보고서는 사비시대(538~660년) 집단 왕릉묘역인 능산리 절터와 부여 나성 사이를 흐르는 계곡에 조성된 능산리 유적을 능산리 고분군을 위한 사찰로 보고 있다.
즉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이른바 1탑1금당식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출토된 불상의 광배와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사리감 등 불교 유물이 많이 확인되고 있음도 이곳이 절터라는 유력한 증거다.
동과 서, 남쪽에 회랑이 둘러져 있는 점은 그 동안의 백제 사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람 배치다. 특히 남쪽 회랑은 기단이 동ㆍ서 회랑과 만나는 지점에서 끝나지 않고 그 바깥쪽 배수로까지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이 유적지가 백제 왕실의 신궁터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보고서는 절터가 물과 늪이 많은 계곡이라는 지리적 취약성을 이겨내기 위해 건축물 자체 구조뿐 아니라 배수로 시설에 각별히 신경을 썼음을 주목하고 있다. 배수로는 동서 양 바깥쪽을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하를 관통하고 있는 배수로도 확인했다.
1993년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대한 과학적 분석결과, 향로는 구리와 주석을 85대 15의 비율로 합금했으며 대략 1천100도에서 녹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금동대향로의 상징성과 각 도상의 성격, 제작 배경이 되는 사상의 문제 등은 이번 보고서에서는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능산리 절터 건물 대부분은 소나무였으나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년)의 생전 이름인 창왕이라는 이름이 적힌 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이 나온 목탑은 궁궐 건축에 사용되는 최고급 자재인 느티나무인 사실도 이번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권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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