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진각종(통리원장 성초) 국제불교연구소는 위덕대 밀교문화연구원과 함께 진각종 창종 53주년기념 학술세미나를 6월 23일 서울 한국일보사 12층 송현클럽에서 개최했다.
'21세기 포교현실과 새로운 방향 모색'이라는 대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 경 정 밀교문화연구원장이 '불교포교의 현대적 방향'
* 최 종남 위덕대 강사가 '서구에서의 불교수용과 포교방향'
(토론자 : 진월 세계종교연합 한국지부 대표)
* 차 차석 동국대 강사가 '개방 후 중국 내 불교의 사회적 위상변화와 그 역할'
(토론자 : 신 규탁 연세대 교수)
* 김 경집 진각종학연구실 상임연구원이 '한국불교 포교의 현황과 전망'
(토론자 : 이 만 동국대 교수)
* 덕 일 위덕대 교수가 '진각종의 초기 교화이념'
(토론자 : 관 증 진각종 교육부장 · 김 영덕 위덕대 교수)
* 무 외 진각종 포교부장이 '진각종 포교의 현황과 과제'
(토론자 : 허 일범 진각대 교수 · 권 기현 위덕대 겸임교수)
을 발표했다. 다음은 발표문의 전문이다.
불교 포교의 현대적 방향
경 정(밀교문화연구원장)
1. 현대 사회와 종교
흔히들 21세기의 특징을 지식기반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지식기반의 사회란 지식의 창출과 창출된 지식의 교류, 즉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물론 과학 지식 등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지식이 중심이 된다. 그 때문에 과학 지식의 특성은 인간과 세계를 객관적인 他者로 두고, 그들이 가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지식이 무한대로 발달하는 것과 인간이 소위 말하는 행복하게 사는 것과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다.
종교는 이러한 현대인의 고민을 해결해야 하는 마지막 보류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가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실적인 존재로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면에서 과학 지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 지식을 실질적인 삶 그 자체로서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로서 종교적 수련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 지식은 종교적 지혜가 바탕이 될 때 부작용 없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과학 지식은 항시 종교적 지혜를 잊어서는 아니되고, 종교는 과학지식을 올바르게 실용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현대사회에 이처럼 종교가 필요한 것은 인간이 가진 知性과 理性, 그리고 感性의 相乘的 개발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지성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창출하고 소유하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의 지성은 분명히 첨단 과학적 지식을 한없이 탐구하여 갈 것이다. 인간은 지성의 덕택으로 편리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의 지성이 창출하여 놓은 지식적 정보에 대한 궁극적 가치를 묻는 것이다. 이성에 의한 이러한 물음이 없으면 지성에 의한 과학적 지식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원자력 발전과 생명복제의 지식이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지성적 기능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어도 생명적 인간을 정열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힘은 감성이다. 감성은 지성과 이성을 활동하게 움직이는 힘이면서, 또한 이성에 의하여 조정되지 않으면, 그 방향성을 잃고 만다.
따라서 지성을 과학적 원리, 이성과 감성을 종교적 원리라 한다면, 양원리의 상보적 활동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보장하고 지속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종교적 포교, 또는 교화를 말하는 것은 지성에 의한 첨단 과학적 지식을 한없이 창출하고 있는 현대라는 사회에 이성과 감성의 본류인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또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 현대에 왜 불교인가
불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함께 일으키는 종교이다. 그것은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이면서 믿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는 인간의 지성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성의 자리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불교는 과학적이면서 과학적 지식을 초월한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불교가 도그마적인 교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方便施設을 자상하게 설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불교는 다양하고 실질적인 수행 방법을 창안하고 있어서 종교가 요구하는 강한 신심을 일으키게 한다. 인간에 있어서 종교적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감성이다. 불교는 실로 인간의 지성적 욕구를 수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이성적 자각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게 할 다양하고 현실적인 수행법을 베풀어서 감성적 실천력을 발휘하게 하는 종교이다.
고도의 과학 지식, 첨단 과학 기술, 급속한 사회 변화, 무한히 편리한 생활 도구, 그리고 무한정의 자연 개발과 환경 파괴, 나아가 인간성의 결핍, 대형 사고와 범죄 등이 현대에 이어서 21세기 사회를 특징지우는 내용들일 것이다. 인간의 지성적 욕구를 무한대로 발휘하여, 물리적인 인간 생활은 더 할 나위 없이 편리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인간의 정신적인 생활은 극히 메마른 사회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21세기는 인간이 그 동안 상상하여 온 신화적인 가상세계를 인터넷 사이버공간에서 현실적인 형태로 경험할 수 있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自我에 대한 물음을 던져놓고 있다. 마음속에 무한정으로 그리던 想像의 세계(이상적인 세계)를 직접 인터넷 사이버공간에서 현실 형태처럼 경험함으로써 그 상상력이 충족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 상상적인 세계를 상실한 것인가.
인간이 가진 심적 상상력을 물리적 가상공간에 실현하는 과학 지식과 기술은 인간의 지적 욕구를 충족할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도 무척 편리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한없이 창출하게 하는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상상력을 주체적으로 조절하는 이성적 지혜의 계발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인터넷 가상공간의 가상현실이 단순히 환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길은 인간의 내적인 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 불교가 될 것이다.
현대적 과학 지식을 즐기고 있는 서구인들이 동양의 지혜, 특히 불교를 동경하고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먼저 불교를 지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접근하였다. 특히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불교를 지적인 학문적인 입장에서 수용하였지만, 이어서 실천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서구 여러 나라의 불교 수용의 현황이 불교학, 선불교, 티베트 불교계통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불교가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처럼 현대 과학 문명이 채우지 못한 부분을 채워서, 그 과학 문명을 가치 있게 하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는 것이다.
3. 현대 포교에 있어서 근본 원리
포교란 교리를 널리 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리를 널리 펴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널리 펴서 인격적 감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교는 교화와 같은 범주에서 일컫는 말이다. 즉 포교는 교리를 널리 펴서 인격적 감화를 가져오게 하는 교화의 활동이다. 인격적 감화란 불교적 언어로 표현하면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교화에도 本末의 원리가 있기 마련이다. 불교적 술어로 말하면 法과 機의 관계이다. 본말은 근본과 지말을 말한다. 교화에는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하는 根本的인 일과 상황에 따라서 적용해야 하는 支末的인 방편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교화의 기본정신을 확실하게 하고 다양한 방편을 베풀어서 교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포교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교의 가르침, 정신을 지키는 일이다. 둘째는 진정한 교화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불교적 수행을 통하여 마무리 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佛法이 世間法의 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뒤의 것은 누구든지 자신에 맞는 수행을 하여 자신의 인격적 정신적 변화(승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가 세간의 현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간을 이끌기 위한 것이지, 불교의 세속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종교)가 세속적 논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리고 불법은 스스로 체험에 의하여 완성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교법과 수행법을 회석하거나 상실하는 것은 포교, 즉 교화의 길이 아니다.
여기서 현대에는 종교가 없고, 종교에는 현대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여 본다. 먼저 현대에는 종교가 없다는 말은 현대인이 종교적인 의례와 활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과 사고 중에서 종교적인 원리가 원동력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인생과 사회가 당면하는 난관을 초극할 때에 종교적 신앙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힘, 즉 과학기술, 사회조직, 체제에의 귀속감 등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소유의 대상들을 세속적인 것이라 한다면, 소위 세속화는 현대사회를 구석구석까지 규제하고 있는 근본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종교적 교리의 해석도 이러한 사고체제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징조도 보이는 것이다. 즉 현대에는 많은 종교적 활동이 있어도, 현대인은 세속적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종교의 形骸化라고 하면 어떨까.
또한 종교에 현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종교단체가 현대사회 중에서 어떠한 활동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종교단체들이 현대사회의 추세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사회봉사, 복지, 의료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벌리고 있다. 즉 세속화된 현대의 상황에 발맞추어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가 바로 종교가 현대 사회에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세속화된 사회에 적응하려고 부심하는 것을 넘어서 현대사회의 세속화의 현상을 확실히 통찰하고, 그것에 대하여 종교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증상에 대하여 일시적인 처방전을 가지고 투약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병적 증상이 나오는 근본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오직 종교에 부과된 고유의 역할이다. 종교가 현대사회의 병적 요인을 통찰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사회적 현상에 적응하는 것은 종교의 자기 상실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종교의 새속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수직적으로 각성하지 않는 한 종교에는 현대사회가 不在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포교 현장에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인과 불교단체들의 행동거지에서 불교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와 활동을 볼 수 있다. 또한 포교활동을 포함한 불교적 활동을 세간적인 기준에 의하여 수행되고 평가되는 세속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포교에 있어서 불교적인 정신과 수행(삶)이 전재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더라도 포교의 탈을 쓴 세속의 행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교의 포교에 있어서 근본 원리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불교 정신에 의한 삶, 즉 正法生活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정법생활의 내용은 佛性을 확신하고 緣起的인 생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법생활은 수행을 통하여 성숙하여 갈 것이다. 정법생활이라는 교화의 근본을 확인하면서 교화의 방편을 다양하게 베풀 때, 참다운 교화가 이루어 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교화의 이름을 가지고 세속화의 길에 힘을 보태는 활동이 될 것이다.
4. 포교의 요소
불교는 佛·法·僧 三寶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불법승 삼보는 원융적 관계에 있지만, 불교가 종교적인 믿음의 면에서는 佛→法→僧의 순으로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적인 포교의 입장에서는 僧→法→佛의 순으로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가르침이 있고, 부처님이 있드라도 실천과 포교가 없으면 그들의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釋尊의 교화 방법을 크게 威儀說法과 對機說法으로 나눌 수 있다. 불교의 포교에 있어서는 포교자(불교인)의 인격적인 힘을 통하여 교화를 하고, 이것에 더하여 중생의 근기(시대의 상황과 인간의 性欲)에 맞추어서 다양한 교화 방편을 펴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 포교에 있어서 僧의 역할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